그리운 여우 - 안도현

홈 > 시 백과 > 시인의 시
시인의 시
 
* 특정 종교나 정치.사상, 이념에 치우친 작품과 다수 회원이 삭제를 요청하는 글은 양해없이 삭제되거나 개인게시판으로 옮겨집니다.
* 저자난에는 이름만 사용해야 하며, 별명이나 아호 등을 사용해 등록자 이름과 저자(시인)의 이름이 달라지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연속해서 올리는 것은 지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목록의 등록자 이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시면 해당 등록자가 올린 작품을 한번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 검색시에는 리스트 하단 <다음검색>버튼으로 나머지 검색 결과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운 여우 - 안도현

poemlove 0 15445
저자 : 안도현     시집명 : 그리운 여우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넣은 아랫방 아궁이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속에 두고 온 어린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 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몇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 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제껴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 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0 Comments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