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일기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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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일기 - 이해인

poemlove 0 8253
저자 : 이해인     시집명 :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1
비 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2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3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4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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