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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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천상병

관리자 0 4833
저자 : 천상병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할까나.

2
저 구름의 연연(連連)한 부피는
온 하늘을 암흑대륙으로 싸았으니
괴묵(怪默)은 그냥, 비만 내리니 천만다행이다.
지금 장마철이니

저 암흑대륙에 저 만리장성이다.
우뢰소리 또한 있을 만하지 않은가.

우주야말로 신비경이 아니냐?
달과 별은 한낮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비는 그 청신호인지 모르지 않는냐?


3
새벽같이 올라와야 했던
이 약수는
몇 월 며칠의 빗물인지도 모르겠다.

산과 옆의 바다는 알 터이나,
하늘과 구름은 뻔히 알겠지만,
입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약수를 마시는 데는 지장이 없고,
맛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니
재수형통만 빌 뿐이다.


4
상식적으로 비는 삼라만상 위에 내린다.
그런데 지붕뿐인 줄 알고,
내실의 꽃병은 아니 맞는 줄 안다.

생각해 보라
삼라만상은 이 우주의 전부이다.
그러니 그 꽃병으도 한참 맞고 있는 것이다.

생리는 그 꽃병을 안 맞게 하지만
실존은 그 꽃병의 진짜 정신을
지붕 위에 있게 하여 맞는 것이다.


5
물의 원소는
수소 두 개와 산소이지만
벌써 중학생 때 익히 알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수소와 산소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공포할 만한 야수가 들어 있다.
수소 뒤에는 수소폭탄이,
산소 뒤에는 원자폭탄이......


6
나는 국민학교 때는
비가 오기만 하면
학교엘 가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천국에 가신 어머니에게
한사코 콩을 볶아달라고 하여
몸이 아프다고 핑계하였다.

이제는 나가겠으나
이미 나이가 사십이니
이 세계를 거꾸로 한들 소용이 없다.

7
8월 장마비는 늦은뱅이다.
농사에는 알맞아 들 테지마는,
인간에겐 하찮은 쓰레기일 것이니......

먼 데 제주도 생각이 불현듯 나니......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제주도여,
마치 런던 옆에나 있는 것이 아니냐.

애오라지 못 갈 바에야,
바닷가로나 가서 먼 데까지 가야지......
그러면은 그 섬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8
백두산 천지에는
언제나 비가 쏟아진다드냐......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산을 쓰셨겠다.

압록강의 원류가 큰소리를 칠 것이니
정암(頂岩)이 소용돌이 쳐
범조차 그 공포에 흐늘흐늘일 것이다.

백운(白雲)을 읊는 고전시는 있어도
이 산을 읊는 고전시는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읊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11
빗물은 대단히 순진무구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물이 불어 오른다.

죽은 김관식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한가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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