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詩學(2)/정용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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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詩學(2)/정용진 시인

정용진 0 1996
저자 : 정용진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2018     출판사 :
죽음의 詩學(2)/정용진 시인

4)근대 시인들의 유시

시인 김삿갓은 순조 7년 1807년 권문세가인 장동(壯洞)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병연(炳淵)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다.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조부 김익순을 모욕한 죄로 하늘을 두려워하여 일생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며 살다가 철종14년 (1863)3월29일 전남 동복 적벽강에서 아래 유시를 남기고 56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 왔노라.
집신에 지팡이 끌고 천리 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일 못되어
해마다 해가 저물면 혼자 슬퍼했노라.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한강가 이름 있는 집에서 자랐노라.

조상은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사람들
장안에서도 이름 높던 가문이었다.
이웃 사람들 생남했다 축하해주며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했건만.

자랄수록 운명이 자꾸만 기구하여
오래잖아 상전이 벽해처럼 변했소.
의지할 친척 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부모마저 돌아가서 집안은 망했도다.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마음은 고향 그리는 여호 같고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부평초처럼 떠돌아가기 몇몇 해던고.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오.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으니
풍월 읊는 행랑은 언제나 비었도다.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후하고 박한 가풍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 이던고
저 하얀 구름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김삿갓>

해몽(海夢) 전봉준(全奉準)녹두장군은 조선말 동학혁명의 지도자로 1854년 철종 5년에 전북 태인에서 태어났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하여 죽창을 손에 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과 진멸권귀(盡滅權貴) 축멸왜이(逐滅倭夷)의기치아래 시호시호 불재래(時好時好 不再來)를 외치면서 농민혁명을 주도하였다.
 고려시대 만적의 난 이후 민중의 봉기로서는 혁명적 거사였다. 그는 키가 너무 작아 별명이 녹두였고 왜군은 푸른색 군복을 입어서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이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어이 널라왔니
솔잎댓닢 푸릇푸릇 봄철인가 널라왔지.

라는 민요가 가난에 찌들고 권세에 억눌려 가슴이 답답한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 져왔다.
 그는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왜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를 칭송하는 파랑새는 민중의 가슴속에 살아 푸르다.

매천(梅泉)황현(黃玹)(1855-1910)선생은 조선말에 올곧은 우국지사다. 자는 운경(雲卿)본은 장수(長水)로 전남 광양 출신이다. 시문에 능하여 1885년 (고종22년)생원시에 장원 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여 향리에 은거 하였다.1910년 (융희4년)일제의 강압으로 조국이 일본과 합방되자 국치를 통분하여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조국이 이런 선열들의 목숨을 바친 음덕으로 독립이 되었는데 일제의 갖은 아양과 간교로 일신을 평안히 누리던 자들이 통치를 하였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사스런 기운에 가리어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은 침침해져 햇살도 더디드네.
조칙도 인제는 다시 있을 수 없어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모두 적시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보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내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일에 서까래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겨우 인(仁)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지 못했어라.
겨우 윤 곡을 따른 데서 그칠 뿐
진동을 못 넘어선 게 부끄럽기만 하여라.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 머리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지껏 그러지를 못했어라
오늘은 참으로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매천. 황현>

일성(一醒)이준(李儁)열사는 1859년 함북 북청에서 태어나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활동 중 순사(殉死)하였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다고 과거에도 급제 하였다. 그가 남긴 유시는 없었지만 그의 분사 소식을 듣고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인 원세개(元世凱)가 보낸 만장(輓章)이 바로 애끓는 시이기에 여기 옮긴다.

가슴 헤쳐 피 뿌리니 그 마음 참됨이여,
장한 절개는 천하 사람의 가슴을 울리네.
만리의 넋 돌아와도 고국은 어지러워
온 나라 그 충성에 눈물 뿌리네.
처자를 두고 어찌 쉬이 눈 감기
랴만나라 위해서는 제 몸도 버렸네
대의는 당당하여 일월에 걸리고  
구천에서 마땅히 백이숙제와 짝하겠네. <원세개>

충정공(忠正公)민영환(閔泳煥)(1861-1905)은 한말의 문신이요 순국지사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병조, 형조 판서를 역임 하였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설움을 달랠 길 없어 5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고국과 국민을 향한 애국 충정을 보였다.

“아!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고?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삼가 이별을 고하노라.“ <민영환>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即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閔泳煥>

 그가 자결한 뒤에 남기고간 피 묻은 옷과 칼을 마루방에다 봉안했는데 이듬해 1906년 7월비로서 그곳을 열고 보았을 때 마루 틈에서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솟아올라 있었다 한다. 그의 애끓는 우국충정이 고려 말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 고사와 함께 우리 민족사의 애국 충절의 표본으로 길이길이 칭송 될 것이다.

백범(白凡 김구 金九)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교육자 겸 종교인, 독립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정치인이었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1]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을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나눠주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3][4]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5],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6] 이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민족 국가(백범 일지에서)"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nbsp;: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하략)...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은 1878년 평양에서 안흥국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으로 공부를 하려고 왔다가 민족이 어려움을 받고 천시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격완성과 경제적 자립임을 깨닫고 해외동포들을 훈련시켜 국력을 기르고 힘이 없어서 잃은 조국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흥사단과 국민회를 조직하고 해외동포들을 훈련 시켜다. 흥사는 흥단을 위하여 흥단은 흥국을 위하여 초지일관한 것이 그의 애국관이요 민족혼이었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안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그이 신념이었다.
 그가 독립 운동을 하다 왜경에 체포되어 검사가 또 독립운동을 하겠느냐? 는 질문에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민족 운동이요, 잠을 자는 것 도 민족운동이다. 나더러 민족운동을 하지마라 하는 것은 죽으라 하는 것과 같다. 죽어도 혼이 있으면 나는 여전히 민족 운동을 계속 할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도산이 단장의 슬픔을 안고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올 때 그가 남긴 거국가(去國歌)는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니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는 애국가와 같은 심경의 토로이기도 하다.
애국가의 가사가 도산이 지었다는 설이 있음도 이에 연유 되었을 성 싶다. 그가 서울대학 병원에서 옥고로 순국 할 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낙심 마오.”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와 도산 우체국이 세워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그가 바라던 염원의 아름다운 결실이다.

안중근(安重根)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安泰勳)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산 안창호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았고 1909년 10월 22일 하르빈 역두에서 조선총독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1910년 3월26일 오전10시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명문과 명필을 많이 남겨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이를 여기 옮겨 놓는다.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동양 대세 생각하매 아득코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들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침략정책 안 고침은 참으로 가엽도다.

눈보라 친 연후 예야 송백의 이울어지지 않음을 아느니라.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려우니라.

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見利思義 見危授命)

임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 바치노니 행여 이 정을 버리지 마소서.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사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그의 최후의 소식을 듣고 청국의 대 정치가 원세게는 
이런 조시를 보냈다. 그 또한 얼마나 그릇이 큰 인물인가?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료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 건데 죽어서 천년을 가오리다.<원세게>

安重根義士 輓章袁世凱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 *袁世凱:1910년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

 이렇게 우리 조국과 민족을 진지하고 가슴 뛰게 한 참 지도자가 과연 우리 역사 속에 몇 분이나 계셨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이 못난 민족 앞에  그 귀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바치신 의사 앞에 우리 모두는 가슴을 기우려야한다.

 안중근이 어려서 늘 선친께 아침 문안을 드렸는데 하루 아침에는 조부가 얼른 그래 잘 잤다. 하시는 말씀이 없이 주저주저 하시기에 여쭈었더니 싯귀가 얼른 생각이 안 떠올라 그런다 하신지라 그가 답한 내용인즉 이러하다.

새벽 이는 삶을 도모하고자 도망을 치는데  (曉蝎圖生潛跡去)
저녁모기는 오히려 소리를 치면서 달려오누나(慕蚊迎事有聲來) 
라는 댓구의 시를 지었다고 하니 어려서부터 그의 문장과 패기가 엿보이는 듯하
다. 나는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를 한 수 올렸다. 속히 님의 유골을 찾아 그가 살아 간절히 원하시던 조국 강산에 모시고 예의를 올렸으면 한다.

安重根義士 義擧 100주년에 부치는 詩
                                              秀 峯  鄭用眞
탕 탕 탕
탕 탕 탕

1909 10월 26일 오전 9시
만주 하얼빈 역에서 육혈포(六穴砲)가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 가슴을 향해
6발의 총성이 불을 토했다.

의사(醫師)는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나
의사(義士)는 나라의 병을 고친다.

안중근 의사는 어려서
조부가 새벽잠을 깨어
이불 위를 기어가는 이(蝎)를 보고
새벽 이는 삶을 도모하고자 잠적 하는구나
(曉蝎圖生 潛跡去) 라고 하는 싯귀에
저녁 모기는 오히려 소리를 치며 달려 오는도다.
(慕蚊迎事 有聲來)라고 기백과 담력의 답을 올렸다.

그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 감옥에서 순국 하였을 지라도
천추만세를 길이 살 것이며
그 이름은 청사(靑史)에 빛나리라.

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見利思義 見危授命)
그의 유언이 귓가에 쟁쟁하다.

이 얼마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절절히 토해놓은
피맺힌 절규인가.

1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의인의 진실 된 말씀에 가슴이 저려온다.

김마리아 독립운동가(1892-1944)

1919년 3.1 항쟁이 터지기 전의 전조(?)는 많았다. 그 가운데 우뚝 선 봉우리라면 역시 2.8 독립선언일 것이다. 일종의 ‘적의 심장부’라 할 일본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으니 일본 제국주의로서는 한 방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꼴이었다.
동경에서는 드물게 함박눈이 내리던 1919년 2월 8일 조선 유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연행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당 대표는 11명, 모두 남자였다. 이 사실에 입술을 깨물던 여자 유학생이 있었다.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장이기도 했던 김마리아였다.
그녀의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만했다. 숙부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와 절친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두루 교유하던 사람이었고 그 영향으로 정신여학교 재학시절 김마리아는 항일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글을 짓는 등 될성부른 떡잎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찍이 기독교인이 됐던 부모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란 그녀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이끈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 일본의 압제를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이루기를 즐겨 기도했다고 한다.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연행됐으나 곧 풀려난 그녀는 이광수가 썼던 2.8 독립선언문을 옷 속에 감추고 꿰맨 채로 국내로 들어온다. 그 선언문을 들고 김마리아가 찾은 것은 천도교 본부였다.
3.1운동 천도교 대표 중 1인이며 후일 독립선언문의 인쇄를 맡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남녀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김마리아는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향할 것을 힘써 권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실천 중이며 또 지난 1914년(갑인년)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김마리아는 스님들 보면 지옥 간다고 아우성치고 단군상 목이나 자르는 오늘날의 ‘개독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독교인이었다.
“조선 여자는 조선 사회에 적합하고 유용하도록 하며, 조선 사회에 헌신할 만하게 가르침이외다.” 라고 얘기했던 그녀는 조선 여성들이 남성들에 뒤지지 않고 조선 독립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고향인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던 그녀는 3.1 항쟁이 터지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고 역시 곧바로 체포됐다. 그녀는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는다.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김마리아 자신의 회고) 그러나 김마리아는 지지 않았다. “너희들 할대로 해라. 그런들 나라 사랑하는 생명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6개월 동안 온갖 악형을 당한 후 석방된 뒤 그녀는 몸도 추스르지 않은 채 모교 교단에 선다. 일종의 위장이었다. 학교 교사를 한다는 것을 방패막이로 그녀는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지속적인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그러다가 1919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 체포된다.
또 한 번 횡액을 치르는 김마리아. 일본 검사의 기록을 훔쳐보면 이렇다. “김마리아는 여자로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를 가졌음으로 그 대담한 태도와 거만한 모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 더욱 가증한 것은 오연히 ‘나는 일본의 연호는 모르는 사람’이라 하면서 서력 일천구백 몇 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의 신민이 아닌 비국민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
호랑이를 능가하는 권세를 지닌 일본 검사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일본 검사는 탄복을 하고 만다. “너는 영웅이다. 너를 낳은 어머니는 더한 영웅이다.”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 박용옥저 중)
 이후 1921년 조선을 탈출하여 상해로 건너간 그녀는 거기서 임시정부 활동을 돕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못다한 공부에 매진한다. 그녀에게 있어 공부란 또 하나의 실천이요 조선의 아쉬움을 깨닫는 일이요, 그 부족함을 공유하고 함께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조선에는) 입과 붓으로 일을 하되 실천궁행하는 이가 없는 듯합니다. 남들의(외국의) 살림살이를 보니 이상이 실현되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여자는 남녀 동등, 여자 해방을 말함보다 실지로 남자와 같은 학식을 가졌으며, 같은 일을 합니다.”
귀국을 하려 했으나 일제는 경성에 들어오지 말 것, 그리고 신학만 가르칠 것을 조건으로 귀국을 허가했다. 그녀가 터를 잡은 것은 원산의 마르타 신학교였다. 1933년 그녀가 귀국할 때 이광수는 이런 시를 써서 그녀를 찬미했다.

누이야 네 가슴에 타오르는 그 사랑을 뉘게다 주랴 하오?네 앞에 손 내민 조선을 안아주오 안아주오!누이야 꽃 같이 곱고 힘 있고 깨끗한 몸을뉘게다 주랴 하오?뉘게다 주랴 하오?네 앞에 팔 벌린 조선에 안기시오 안기시오!누이야 청춘도 가고 사랑도 생명도 다 가는 인생이요 아니 가는 것은 영원한 조선이니 당신의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치시오, 조선에!

 사랑과 생명을 엉뚱한 놈한테 바칠 태세를 갖추던 춘원 이광수의 영탄이 좀 어이없기는 하지만 안창호가 “그녀 같은 사람 열 명만 있어도 조선은 독립됐다.”고 하던 김마리아는 돌아왔다.
그러나 가시밭길은 계속됐다. 그녀가 조선에 돌아온 뒤 보낸 10년은 일제의 광기가 극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만주사변은 이미 일어난 뒤였고 중국에 전쟁을 걸었고 급기야 미국의 진주만을 들이쳤다. 그 와중에 아예 조선민족을 없애버리겠다는 듯 민족말살정책은 극에 달했고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기독교 지도자들도 거의 모두 손뼉 치고 고개 숙이는 신사 의식을 치렀고 과거 그의 동료들은 학병에 나가 대동아성전에 몸바치라 악을 써대고 있었다. 김마리아는 기독교인으로서, 또 조선 사람으로서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1944년 3월 13일 그녀는 물고문 도중 이물질이 들어간 코 안에서 생긴 질병과 그 외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달라는 것. 수저 한 벌이 그녀의 유품의 전부였을만큼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쉰 두 살 독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평생 사모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빼놓지 못할 지운 김철수. 조선공산당의 핵심 멤버였고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갈라서 여운형과 함께 했지만 여운형이 암살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던 지운 김철수가 그였다.
그는 김마리아를 몹시 사모했고 주위에서도 맺어주려고 애를 썼으나 김철수는 고향에 조강지처가 있음을 들어 거부했다. (이때는 고향의 처가 있건 말건 이른바 신여성과 교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기)
김철수는 벽에 두 명의 사진을 걸고 “용서하라”는 뜻의 ‘서호’(恕乎) 자를 써 붙여 놓고 보면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하나는 일생을 무장 독립 투쟁에 바치다가 옥사한 일송 김동삼. 그리고 김마리아였다. 배신과 변절, 복수와 살인의 추악한 파노라마가 펼쳐진 한국 현대사를 김철수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 김마리아를 바라보며 흘러보냈다.
누군가를 평생 사랑했지만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또한 잊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극받았던 김철수, 그리고 그가 평생 지켜본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죽어서나 행복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김철수에게도 공감이 간다. 그런 사랑도 괜찮고 가능하구나 싶어서.
1944년 3월 13일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김마리아가 죽었다

유관순 열사(柳寬順)(1902년 12월 16일[1] ~ 1920년 9월 28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천안에서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2]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시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순국하신 나이가 17세.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nbsp;
충남 예산에서&nbsp;농부의 아들로&nbsp;태어나,&nbsp;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nbsp;한문을&nbsp;배웠다.&nbsp; &nbsp;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nbsp;3·1운동 후&nbsp;
일본식 교육을&nbsp;받기 싫어 중퇴하였다.&nbsp;
19세 때&nbsp;길에서&nbsp;글을 몰라&nbsp;아버지의 무덤을&nbsp;못 찾는
무식한&nbsp;청년을 보고,&nbsp;자기 집사랑방에서&nbsp;야학을 열어&nbsp;
농민들을&nbsp;가르쳤다.&nbsp;
젊은 때에는&nbsp;월진회를&nbsp;조직하여&nbsp;청소년들에게&nbsp;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nbsp;협동을&nbsp;강조하였다.&nbsp;이러한 활동이&nbsp;
일제의 탄압을&nbsp;받게 되자, 중국 상하이로&nbsp;건너가&nbsp;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nbsp;&nbsp;그 뒤&nbsp;김구의&nbsp;특명을 받아 1932년 4월 29일&nbsp;상하이&nbsp;홍구&nbsp;공원에서 열린&nbsp;일본천황생일
경축식장에&nbsp;폭탄을 던져,&nbsp;일본군&nbsp;최고 사령관&nbsp;시라카와를&nbsp;비롯하여&nbsp;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nbsp;죽이고&nbsp;노무라 등 많은&nbsp;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소식을 들은&nbsp;중국의 장&nbsp;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nbsp;일을&nbsp;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nbsp; 칭찬을&nbsp; 아끼지 않았다.&nbsp;그 뒤&nbsp;오사카&nbsp;군법 회의에서&nbsp;사형 선고를 받고&nbsp;처형당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유언의 일부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nbsp;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nbsp;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5)현대 시인들의 유시

 윤동주(尹東柱)시인은 1917년 북간도 동명 촌에서 태어나 숭실, 동명 중학을 졸업 한 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구주 일본 동경 입교대학을 거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1944년 2년 형을 선고받고 복강형무소에 수감 중 1945년 2월16일 형무소에서 별세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읽어 감동을 받는 “서시”를 유시처럼 남기고 조금만 있으면 맞이할 조국 해방을 못 본채  세상을 떠났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尹東柱>

 운명의 길을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는 아픔을 우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시인 윤동주에게서 절실히 보고 아프게 깨닫는다. 아주 짧은 세월만 더 살았더라면 그들은 꿈속에서 그리던 조국 해방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학문의 깊이가 있었으면 그의 싯귀에 맹자집주 13장3락에 ‘부모가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면 “첫 번째 기쁨이요, 하늘을 우러러 한 덩이 부끄러움이 없고, 고개 숙여 사람을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면 두 번째 기쁨이라(仰塊於天 俯不作於人)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을 논한 것을 보면 한문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미당(未堂)서정주(徐廷柱)시인은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숱한 사연을 뿌리면서 한국 서정시의 토대를 구축한 명인이다. 그의 서정성에 흠뻑 빠지다 보면 친일, 독재찬양 등 흠과 티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그를 못 잊어하는 것은 그의 독창적인 서정성에 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워 부른 길마재의 노래를 들어보자.

길마재의 노래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제, 질마제, 고향 질마제.

소나무 바람 소리 피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음.

지붕위에 바가지 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 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릴리요. <서정주>

 금년 가을에는 그의 명작 “국화 옆에서”를 기리는 무명의 시인이 길마재를 1억 송이의 황국으로 덮어서 화제다. 미당은 저승에서도 국화주를 들며 기뻐하겠다.

 편운(片雲)조병화(趙炳華)시인은 1921년 경기 안성에서 태어나 일본 고등사범에서 수학하였고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살다갔다. 그는 3천여 편의 시를 남기고 2003년 3월8일 어머님의 심부름을 왔다 어머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으로 “꿈의 고향”이란 시를 새겼다.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 왔습니다. <조병화>

 이 시를 남기고 한 조각 구름으로 다시 어머님께 돌아갔다.

천상병(千祥炳)시인은 1930년 태어나서 고교3학년 때 처녀 시 “강물‘로 등단했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박정희 독재가 칼날을 세우고 무소불위 날뛰던 어두움의 시절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침묵을 하다가 “그날은-새”를 내놓았다

이젠 몇 년 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 이었는가
무서운 짐 뒷 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천상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들면 어떻게 가느냐고 묻는 시인.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당하고 아이도 낳을 수 없다 던 그, 그가 빈 손으로 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의금으로 모인 3백 만원을 둘 곳이 없어서 쩔쩔매던 장모가 아궁이에 넣어둔 것을 모르고 연탄불을 넣어 태워버리고 빈손으로 떠난 천상병 시인은 여비가 없어서 어떻게 저승에 갔을까? 인간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더니 알 수가 없는 신비의 세계일 뿐이다.

경허 스님 열반송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습니다.
&nbsp;시적(示寂) 그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습니다.
心月孤圓光呑萬像 光境俱忘復是何物
&nbsp;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스님과 혜월(慧月)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

6) 근세들의 유시
 근세 작고하신 분들의 유언과 유시들을 여기에 옮겨 놓는다.

숭산(崇山) 스님은 2004년 11월 30일 입적하셨다.

<&nbsp;열&nbsp; 반&nbsp; 송 >&nbsp;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유수)니라&nbsp;,
다 걱정하지 마라, 아주 먼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萬古)&nbsp; 부처나 보살의 지혜의 빛은(光明),&nbsp;&nbsp;&nbsp; 본래의 모습 그대로여서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靑山流水)&nbsp;. 고요하면 대지와 허공이 사라지고움직이면 그 모습 드러낸다&nbsp;보고 듣는 모든것이 그러하여&nbsp;.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모습들,&nbsp;&nbsp;&nbsp; 있는 그대로가 경이로움이니 . "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순간)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되&nbsp;&nbsp;&nbsp;"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순간의 지속성) ,. 알고 모르는것 일시에 사라져 일체의 차별 없으며空도 아니요 有도 아니면서 공,과 유 다 아우르고해탈이다 열반이다 이름 없고 그 대상 없음이요&nbsp; . , "나" 다 "남"이다 벽 허물어져.&nbsp;나와 남을 묶었던 결박 동시에 풀어진다&nbsp;. 사라지고 나타남이 걸림이 없어때로는 이름없는 들풀과 이야기 하며&nbsp;쌀 한톨에서도 검게 그을린 농부의 모습을 본다&nbsp;&nbsp;&nbsp; 존재 하는 모든것 들과 한 몸인데.&nbsp;어느것을 취하고 버릴것이 있는가&nbsp; .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크거나 작은것작은 티끌부터 허공에 이르기까지&nbsp;모든것에 두루 통하여. "평등" 하고 "평등"&nbsp;하다&nbsp;,지혜의 빛은 자연스러운 몸짓을 하니&nbsp;.&nbsp;그것을 "자비" 라 할뿐, 불은 뜨겁고 물은 흐르듯이 성품이 본래 그러하다. 있는 그대로가 정각(正覺)임을 자각(自覺) 하는것&nbsp;누구나 다 갖추고 있되,&nbsp;차돌속에 불이 있으나 치지 않는다&nbsp; . 다 걱정하지 마라, 이 지혜의 빛,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 여서&nbsp;"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 간다"&nbsp;.&nbsp;&nbsp; 오로지 정진, 또 정진만 할것이라 . 고요하고(寂) 사라짐이(滅) 둘이 아니어서 적멸(寂滅)이며보고 듣는 일체의 것은 생멸(生滅)이다&nbsp;.&nbsp;숨고(사라지고), 나타남이 걸림이 없어 은현무애(隱顯無碍)요&nbsp;&nbsp;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여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적멸과 생멸을 다 아우르니, 적멸 밖에 생멸 따로 없고, 생멸 밖에 적멸 따로 없다&nbsp;적멸은 생멸의 본체요 생멸은 적멸의 작용이니,본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지고. 작용은 본체로 말미암아 생기느니"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다 걱정하지 마라,생멸(生滅)과 적멸(寂滅), 원적(圓寂) 이로다,"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nbsp;.

&nbsp;설송(雪松) 스님은 수원 일광사에서 법화경(묘법연화경)을 깨친 뒤 대한불교 불승종(佛乘宗)을 창종(創宗)했고 종주가 되어 1980년대에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신리에 현불사를 세웠다. 09년 5월 17일 현불사에서 91세를 일기로 입적해했다. 그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하여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현대판 무학대사로 숭앙을 받았다. 그는 열반송으로 아래와 같은 법문을 남겼다.

내왕과거 지재몽(來往過去 只在夢)
인생도시 여화개(人生都是 如花介)

“오고간 날들이 다만 꿈이로다.
산다는 건 모두 꽃 피고 짐 같다.“ <雪松 宗主>

제 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대통령은 아래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그가 태어난 경남 김해시 봉하 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추락하여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09. 5월 23일 오전 5시 21분)

민주주의를 완성하라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다.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히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젠가는 온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하면
빨리 오고,
외면하면 늦게 온다.

나는 이기는 길이 무엇인지,
또 지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오른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요즘에 잘 때 내 아내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 민주주의와 민생 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잠을 잔다.
정치, 경제, 남북관계에 위기가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10년 민주정부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급해졌다. 기가 막히다.

반드시 지는 길이 있다.
탄압을 해도 ‘무섭다’ 귀찮다‘ ’내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행동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고 망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악이 승리한다.

폭력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해도 결과가 나쁘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과 싸울 때 ‘비폭력 투쟁’으로 했다.
투쟁해야 하지만 폭력투쟁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투쟁을 안 하는 것이 났다.

간디는 집회에 나갔다가도 폭력을 쓰면 돌아왔다.
폭력을 쓰면 다수가 모이지 못하고 그 자체로서 도덕성이 없다.
영국이 인도 총독부를 통해 소금을 비싸게 팔자
그것에 반대해 해안가로 가서 직접 소금을 구어 자급자족하자
영국이 굴복했다.

이렇게 민심이 돌아가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비폭력으로 성공해 미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폭력을 쓰면 더 큰 폭력을 유발한다.
그 책임은 폭력을 쓴 사람이 지게 된다.
자기들 폭력은 적당히 넘기고
우리 쪽 폭력을 쓴 사람이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
그래서 폭력은 순리의 길도 아니고 계산상으로도 맞지 않다.

모두가 어떤 형태든 자기 위치에서 행동해서 악에 저항하면 이긴다.
적당히 하면 진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투쟁에는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비폭력 투쟁을 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을 동원하되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때리면 맞고 잡아가면 끌려가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최근 보수에서 중도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궁여지책으로 그런 것이다.
백성의 힘은 무한하고, 진 일이 없다.
저항하지 않고 굴복하면 안 된다.
농노들이 5-600년 동안 노예로 살았지만
노동자들은 2-300년 만에 정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각성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남북관계는 대화가 시작 될 것이다.
확고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민족끼리 절대 전쟁해선 안 된다는 것을 굳게 지켜야 한다.
정부와 여당 내에서 위험한 소리가 있는데
조상과 후손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다.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2009년 6월25일에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 30여명과 오찬을 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김 전 대통령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참석자들도 함께 울었고 그 후 입원한 후 서거하여 유언으로 남았다. 09.8.18일 서거 8월 23일 국장. 국립 현충원 안장.>

상여소리

          너와! 너허!
          너와 넝차 너허와!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집 앞이 북망일세
가네 가네 나는 가네 북망산천 나는가네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가네
이제가면 언제 오나 기약 없는 길이구나
이제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을 알려주오

          너와! 너허!
          너와 넝차 너허와!

잘있으오 잘사시오 모두모두 잘있으오
사랑하는 내 가족들 부디부디 잘있으오
천년만년 살자 약속 부질없는 꿈이었네
살아생전 많은 친구 어느 누가 동무될까
일가친척 많다 해도 어느 누가 대신할까
극락세계 좋다지만 이승보다 좋을손가

          너와! 너허
          너와 넝차 너와!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때 서편제 국악가수 오정해가 불렀음>“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무소유의 고귀한 삶 법정스님.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    <法頂스님>

그는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버렸다.
다비준비위 대변인 진화 스님은 “10일 밤 법정 스님이 ‘모든 분께 감사한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군에서 태어나 전남대 상과대 3년을 수료한 뒤 22세 때인 1954년 경남 통영시 미래사에서 효봉(曉峰)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59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戒師) 계를 주는 스님)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경남 합천군 해인사, 경남 하동군 쌍계사, 송광사 등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 수련원장 등종단 소임을 몇 차례 맡았을 뿐 수행자로서 본분에 충실했다. 1994∼2003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회주(會主모임이나법회를 이끄는 사람)와 1997∼2003년 서울 길상사 회주를 지냈다.
이 분이 머물던 곳 중 대표적인 장소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머물었던 송광사 불일암이다. 스님은 강원도 평창 모처로 옮기기 전까지 '무소유(1976)'등 많은 저서를&nbsp; 이곳에서 저서를 집필했다.
 스님께서는 입적 하시기전 내가 입적 하여도 사리도 줍지마라. 헌 옷을 입혀라. 비석도 세우지말고 내 책들은 다시 펴내지 마라. 당부하셨다.
 그는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 피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여라, 아름다운 마무리, 법문집, 일기일회는 주옥같은 30여편의 저서를 남겼다.

2010 3월 13일
 송광사에서 봉행된 법정스님의 다비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 2만5천여명(경찰 추산)이 운집했지만 단 1건의 안전사고도 없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순천경찰서는 지원 인원 등을 포함해 모두 200여명의 경찰력을 송광사 주변 도로와 진입로 입구 다비장 등에 집중 배치해 교통통제와 안내, 안전사고를 포함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크게 긴장했으나 모든 행사가 무사히 종료되자 안도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 보자" 절벽 비탈도 '감수' 법정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려는 추모객들은 경사가 70도에 가까운 산비탈을 오르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송광사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한 스님의 법구를 따라 산속 깊은 다비장 까지 함께 올라온 추모객만 수천명. 30분간 산길을 걸었던 대규모 추모 행렬은 준비된 원형의 다비장이 협소해 보이자 다비장을 둘러싸고 있는 급경사의 산비탈을 올라타기 시작했다.  비탈 경사가 70도에 가까웠지만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까지도 "스님의 마지막길을 보고 싶다"며 나무와 풀에 의지해 위험천만한 비탈로 발걸음을 내디뎠다.다비장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싸게 된 추모객들은 서 있기조차 불편한 상황에서도 거화(炬火) 의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나무와 함께 법구가 활활 타오르자 추모객은 "아!"하며 탄성을 내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큰 스님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화창한 봄 날씨..스님 가시는 길 큰 부조
 다비식이 봉행되는 13일 기상이 전형적인 화창한 봄 날씨를 보이자 추모객들은 날씨가 큰스님 마지막 가는 길에 큰 부조를 했다고 반겼다.이는 최근 지역의 날씨가 비나 눈이 오고 강풍이 부는 등 악천후가 수일 째 계속되다 지난 10일부터 개기 시작, 큰스님 입적일과 다비식이 봉행되는 이틀 동안은 쾌청한 날씨를 보였다.추모객들은 "사찰과 다비장이 산 속에 있어 길도 먼 데다 날씨까지 궂었다면 추모객들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스님을 입적을 맞이하여 ‘추모시‘를 올렸다.

<추모시>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秀峯 鄭用眞 拜
極樂世界 蓮花臺
往生의 축복을 누리시고
법정스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세속의 온갖 번뇌
아득히 잊으시고
一切衆生 皆苦
무거운 인생의 짐을
다 내려놓으시고
天上天下 唯我獨尊
황금빛 미소로
고요히 웃으시는 
부처님의 품안에서
涅槃에 드시고
法悅을 들으시다
다시 幻生 하소서.

사리도 줍지 마라.
헌옷을 입혀라
비석도 세우지 말고
내 책들은  다시 펴내지 마라.

스님 불 들어갑니다.
뜨거워요 어서 나오세요
중생들의 오열 속에

無所有
빈 맘 빈손으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훌훌히 떠나가신 스님.

合掌하노니
無爲寂靜
寂滅의 세계에서
부디 極樂往生하소서.

피카소의 말처럼 “인생은 짧지만 참되고 아름답게  살기에는 길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신 지관(智冠) 스님은 많은 불경 원서를 해역본(解譯本)으로 남기셨는데 그가 총무원장 직을 마치고 떠나실 때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내리는 것뿐이다.” 담담하게 말씀하셔 인품의 무거우심을 단적으로 나타내신 분이다.
 입적하실 때 임종게로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 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 팔십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를 남기고 합천 해인사에서 다비장(茶毘葬)을 끝으로 적멸에 드셨다.

7)맺는 말
 
 철인 크라테스는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사는 것이 문제다.”라고 역설하였다. 적어도 자신이 당당한 한민족이라면 이런 선인들의 유시와 유언을 접하면서 가슴에 찔리는바가 없었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는 지상에 단 한번 주어진 생이 세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빌어 말한 아래의 시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한가? 그 형상과 동작은 얼마나 명확하고 훌륭한가?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력은 신과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다.” 
 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또 신곡 연옥편에서 단테가 설파한 생의 고난에 대한 격려를 살펴보자.

“이 산을 오르려는 자 그 기슭에서 큰 고난을 당할지나 오름에 따라 고난은 덜하리라. 너의 고난은 이제 차츰 즐거움이 되고 머지  않아 극히 오르기 쉬우며 쪽배로 빠른 강을 내려가듯 하리라.”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격려와 사랑과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밤 자고나면 이해득실을 가늠하면서 엇박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를 향하여 영원 불별의 유시를 남겨주고 있다.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거부하고 방황하다 그에 잡힌바 되어 죽도록 충성한 후 그가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고백한 천추만대의 명 유언이다.

 나는 이제 이 논문을 끝내려한다. 그런데 우리 민족 현대사에서 전두환 정권시 5.18 민주항쟁의 비극을 잊을 수 가 없다. 그 당시 상황을 살아남은 자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너무나 처절하고 절절하게 읊은 시인의 노래가 있다.
바로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이시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
광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노래함 -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 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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