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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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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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poemlove 1 8261
저자 : 기형도     시집명 : 입 속의 검은 잎
출판(발표)연도 : 1989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1 Comments
최일화 2011.08.18 02:52  
안개?
무진기행?
도가니?
나는 소설엔 문외한인데 왜 얼른 '무진기행'과 공지영의 '도가니'가 떠오를까?
하여튼 내가 이 시를 읽고 즐겁다던지 감동을 받았다는 인상보다는 문학교수나 평론가가 한번 쯤 다뤄야 할 문제작쯤으로 인식했다면 나의 시읽기가 너무 무책임한 것일까?
이 시는 기형도가 살았던 80년대의 풍경화일 것이다.
안개는 바로 안개정국, 오리무중과 같이 앞을 분간하지 못할 때 흔히 비유되는 말이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안개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열거해놓았을 뿐인데 시가 되었다.
안개속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여공이 겁탈당하지만 사람들은 곧 안개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80년대를 산 나도 그 상황에 곧 익숙해져서 지내왔을 것이다.
한 젊은 시인이 이처럼 통렬하게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뉴스를 보고 시를 읽으며 보냈을 것이다.
기형도가 바라본 세상풍경, 다시 한번 천천이 읽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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