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바람에 실려가는 꽃잎 같은 너의 입술 -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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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바람에 실려가는 꽃잎 같은 너의 입술 - 김용택

관리자 0 7228
저자 : 김용택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저녁 내내 비가 온다
 자다 깨다
 물소리는 커지고
 일어났다 앉았다 도로 누웠다 일어나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길어난 손톱을 자른다
 빗소리를 따라
 봄은 오는데,
 봄은 저렇게 오는데
 이렇게 길어난 손톱을 몇 번이나 깎아야
 너는 오느냐
 너를 볼 수 있느냐
 그리움을 뚫고
 오는
 빛나는 너의 얼굴을 언제나 마주보며
 내 더운 손으로 너의 두 얼굴을 감쌀 수 있느냐

 저기 저 꽃잎은 제 몸무게로 떨어지고, 떨어지는 꽃잎은 봄바람이 실어간다.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이룬 세상은 포크레인과 불도저로밖에는 죽일 수 없다. 내가 나를 죽인다. 오호라! 저 거대한 집, 저 암 줄기 같은 죽음의 검은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수많은 차들 위로 봄비가 소리치며 떨어져 검은 눈물로 흐른다.
 물오른 나무들 곁은 나는 지난다. 나뭇가지 끝,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는, 그 끝에서 잎이, 꽃이 세사을 향해 터진다. 새잎만이 속살 젖고 영롱한 이슬을 단다. 얼굴이,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이 내용물 없는 봄바람에 내 얼굴이 녹을 것 같다. 아, 가벼워라 안개 속에 안개 비에 젖은 나무들, 잎 피기 직전의 꽃피는 저 잔가지들의 간지러운 끄트머리, 성스러운, 거룩하게 안개 속에 서서 비에 젖은 나무 곁을 지나면 또 잎 피는 한 나무가 한발 내 앞으로 나선다. 아, 작은 호수에 물결처럼 잔주름을 밀어내고 뼛속까지 환해지는 내 발등. 사랑하는 여인의 몸으로 내가 녹듯이 봄 들판 허공에 나는 녹아 스민다. 오, 자꾸 가벼워라 내 발걸음은, 사랑처럼 가벼워라. 봄비는 내용물 없는 봄바람을 타고 흙 위에 내린다.
 비가 온다.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빗줄기를 보면
 나도 옷 벗고 싶어진다. 옷 다 벗고 이불 속에 있는 따스한 여인 곁으로가듯 나도 옷 다 벗은 빗줄기와 나란히 아름다운 풀잎 위로 가고 싶다.
 세상을 다 받아들이는 봄 들판, 그 들판에 쑥들이 돋아나고
 밭에는 봄보리들이 파랗게 자란다. 아지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새 땅에 흐르는 물 불어난 시냇물을 건너면,
 나무들이 내 앞에 끝없이 나서는, 나무들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세상에 필요한 것을 주고 언제 바라보아도 완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나무에게로 세상 모든 것이 다 찾아간다. 별, 해, 달, 눈이 가고, 비가 가고, 나도 가도, 나무는 시다. 나무는 소설이다. 잎 피는 나무는 혁명정부다. 새 연인이다. 새로 쓰는 역사다. 나무는, 나무는, 나무는, 나무, 나무 또 나무를 올려다 보며 한없이 성스럽게 잎 피는 나무들 곁을 지나
 이 봄
 당신에게로 가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개미가 까맣게 기어다니고 잔 자갈들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길, 바람이 불면 먼지가 뽀얗게 이는 포플러 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는 한적한 길입니다.
 봄 빛이 가득하면,
 처녀들이 빨래하는 시냇가에 붉은 소들이 풀을 뜯고
 그 푸른 언덕
 흙기을 따라 노란 꽃다지들이 이웃 마을로 놀러가는,
 사람들이 깐닥깐닥,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서 집에 가는 길입니다.
 작고 어여쁜 산 하나를 발가벗겨놓고, 포크레인 두 대가 산꼭대기부터 산을 서서히 파먹고 있다. 수만년을 그려온 산의 아름답고 신비한 곡선을 지우고 있다. 깎아내린다. 포크레인의 쇠손에서 버려진 흙들이 아우성으로 와르르 굴러내리며 산산이 부서진다. 오! 오! 진실은 비명도 없이 묻힌다. 무서워라 흙을 버리고 흙을 파러 가는 저 막강한 포크레인의 손. 산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아무 데나 막히고, 아무 데나 새 길이 생겨 우리는 턱없이 빨리 가고, 느닷없이 낯선 곳을 멀리 돌아간다. 저 산이 사라진 저 허공에는 무엇이 자리를 잡을까. 저 텅 빈 공간 너머로는 무엇이 보일까. 예고도 없이 덮쳐버린 저 거대한 흙더미 속에 묻힌 작고 어여쁜 집들, 아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 캄캄한 어둠을 어쩌란 말인가. 먼 데 갔다가 돌아와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맬 산 짐승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들의 집. 거기 살던 도토리나무와 상수리나무와 산벚나무와 원추리와 깨금나무와 진달래와...... 나비야, 저 청산을 어찌 날아가리. 저 허공.
 저 비워진 허공의 공포.

 신기하게도 아침에 본 아내에게서 학교로 편지가 왔다.

 당신께.
 당신이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게
 오늘은 더 행복합니다
 나도 어제, 내리는 봄비를 보며
 당신 생각 많이 했습니다
 늘 당신 눈길이 머무는 강이며, 운동장
 몇안 되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
 따뜻한 숙직실에 초이, 소희, 창후, 다희 순서로 나란이 이불 속에 눕혀 한숨 재웠다는 당신.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당신의 노래보다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걸 나는 압니다
 오월이 오면 우리 만난 지 십육 년이 됩니다
 십육 년을 하루처럼 내게 다정한 당신이지만
 오늘 당신이 내게 불러준 사랑노래는
 이 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당신이 나를 너무도 소중히 여겨
 나는 이 세상에 귀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여보 고맙습니다.
 당신의 아내.

 오! 이런?
 산수유나무에서는 틀림없이 산수유 노란 꽃이 피고
 진달래나무에서는 진달래꽃만 핀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도 봄에만 핀다는 것을.
 내가 지나는 어떤 시골집 뒤꼍 불지른 마늘밭에는 끝이 까맣게 탄 마늘이 땅을 뚫고 파랗게 지구 위로 솟아 오른다. 어떤 놈은 작은 자갈을 , 작은 흙덩이를 머리에 이고 솟아나며 세상을 두리번거리고, 어떤 놈은 갓난아기 주먹만한 돌멩이 때문에 이 세상에 처음 나온 파란 몸이 구부러져 있다. 그래도 밀고 나온다. 아, 아, 그 피할 수 없는 돌멩이의 어둠을 피해 옆으로 나온다, 마늘싹이. 오! 저 땅을 뚫고 솟는 겁나느 힘, 지구를 끝까지 밀어올리는 저 놀라운 힘. 진실은 질 때도 있지만 묻히진 않는다. 그 뒷집 대문 앞, 해는 지는데

 어린 매화나무가
 혼자 눈부시게
 서 있다.

 꽃이 핀다.
 내 생각의 절정,
 그 절정의 끝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터지는 진달래꽃은 누구를 부르는 울음이더냐. 누구를 만난 웃음이더냐. 어디를 향한 외침이더냐. 울고 웃는 저 꽃은 내 시이다. 보아라! 세상의 나무들아. 하늘을 나는 새들아! 땅위를 걷는 짐승들아! 사람들아! 저 봄 나무에 잎이 피고 꽃이 피면 우리들이 어찌 꽃을 다 보겠느냐. 시는 세상의 꽃이다. 시를 가지고 폼잡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나는, 차라리, 한국 영화 속의 깡패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까만 양복에다가 짧은 머리 딱 벌어진 푸른 어깨와 무표정한 인상으로 각목을 들고 상대방을 박살내려 가는 모습은 그 얼마나 싱싱해 보이고 그들의 권력은 때로 그 얼마나 깨끗하고 귀엽고 산뜻한가. 비현실적인 죽음은 또 얼마나 극적인가. 시는 죽어가는 것들을 살린다. 이 하루, 길고 긴 하루 포크레인은 산과 허공의 경계, 그 모습을 얼마나 지워버렸을까. 다시는 그 산이 그려질 수 없는 그 허공. 비가 그냥 지나가야 할 그 쓰라린, 오 낯선 저 허공.
 이제 다시는 어디에 다정히 닿을 길 없는 이 봄날의 가여운 저 빗방울들,
 산산이 부서지는 이름들.

 빗소리를 들으며,
 나도 몰래
 길어난 손톱을 차례차례 깎는다.
 그리움의 길이를 깎는다.
 이렇게 길어난 손톱을 몇번이나 더
 깎아야 너는 내 문을 똑똑 두드리며 오겠느냐.
 그리운 너의 얼굴을
 내 두 손으로 감싸고
 보드라운 너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갤 수 있느냐.

 나는 기다린다
 나의 사랑을.
 동구의 검은 바위처럼, 죽어가면서 새로 잎을 피우는 뒷동산 느티나무처럼, 호젓한 산길을 내려오는 백도라지꽃처럼, 저 봄길 모퉁이를 돌아오는 그리운 너의 강물처럼, 나는 기다린다. 너를,
 나의 시를.

 봄 바람에 실려가는 꽃잎 같은 너의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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