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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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음악을 들으며

임백령 0 740
저자 : 임백령     시집명 : 거대한 트리
출판(발표)연도 : 2016,06.30     출판사 : 전북대학교출판문화원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음악을 들으며>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음악을 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스 식 발음으로 음절 하나하나마다 힘을 주어
슬픔의 음표들에 비장한 악센트 꾹꾹 심으면
무력하고 서러운 발자국들 내 발아래 밟힌다.
오랜 나무 하나 부르르르 이파리를 떨며
꼭 나라 잃은 투쟁가의 비장한 마음 아니어도
가파른 언덕 세워 그 위를 넘어가는 나의 길
가보라고 가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채찍질 앞세운다.
긴 세월 멈춰 선 자의 무심한 눈초리에서
꺼져 있던 태양빛 타올라 붉게 이글거린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기 전 태양이 지기도 전에
정확히는 바람이 불어오기 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래 안에서 가라앉기를 준비하는 너의 열정
혁명음악가의 어두운 골짜기로 망명해서
과거의 추억이나 만지작거리는 너의 결행은
생각난 듯 다만 울컥거리게 할 뿐이어서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음악을 듣다 보면
갇혀 있는 길 하나 울음소리 귀를 찌른다.

https://youtu.be/M08S_apQ0yU
(여기 위를 누르시면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진보/예술/그리고/감동]그리스 반독재운동 상징 "적색분자"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작곡가 데오도라키스(1925~)는 음악적 업적만큼이나 정치적 인물로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한 그리스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그의 삶의 궤적은 그대로 그리스 현대사와 연결돼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데오도라키스는 점령군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항하던 청년단체에 가담하면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이력은 시작된다. 전후 영국의 내정간섭으로 그리스는 좌우로 양분돼 내전(Civil War, 1944~1949)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이 기간 중 좌익계의 민족해방전선은 외세에 대항해 극렬한 저항운동을 펼쳤지만, 1946년 왕정이 복고돼 빨갱이 사냥은 계속되었고 데오도라키스는 적색분자로 체포돼 마크로니소스 섬의 수용소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턱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6년여의 내전은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은 반(反)공산주의 연합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종식 후 아테네 음악원과 파리 음악원 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았고 "코플리 음악상" 수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데오도라키스의 젊은 시절 정치적 투쟁은 1960년대 들어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음악으로 나타났다. 그 뿌리는 민족악기 부주끼와 전통음악인 렘베티카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노스 하지타키스와 더불어 그리스 민중의 정서를 담은 수많은 가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왕정은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으로 규정했고, 때마침 평화시위행진 중이던 EDA(좌익민주연합) 의장 람브라키스가 테러로 사망하면서 시위는 격화된다.
 이에 데오도라키스는 1963년에 람브라키스 민주청년당(Lambrakis Democratic Youth)를 설립하고, 1964년에 피레우스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적 역량을 지속하였다.
 왕정에 대한 반체제 시위는 새로운 의회의 선거를 약속했지만, 1967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계엄령 아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섬으로 추방당하였다.
 또한 검열과 고문은 파시스트 정권의 표현이었다. 좌파 운동과 함께 혁명가요가 대중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군부는 군법령 13호를 발표했다. 그 중에는 직접 데오도라키스의 작곡, 지휘, 연주, 심지어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데오도라키스의 노래들과 같은 네오 키마와 렘베티카는 지식인과 학생의 반독재 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다시 한 번 불을 지피며 부활했고 지하클럽에서 신진 가수들에 의해 맥을 이어나갔다.
 데오도라키스는 지하에서 활동하며 '애국전선'을 도모했지만 체포되어 투옥됐다. 하지만 1957년 모스크바 음악제에 그리스 대표 파견단으로 참여했을 때 심사위원 쇼스타코비치와 한스 아이슬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가 아서 밀러와 대중음악가수 해리 벨라폰테 등이 주도한 국제 연대운동으로 데오도라키스는 3년여만에 석방됐고, 곧 세계여론에 밀린 군부는 데오도라키스를 국외로 추방시켰다.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세계적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약 천 회의 음악회를 주최했고 '독재에 반대하는 저항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1983년에 레닌 평화상 수상, 1987년 터키의 국민 작곡가 줄푸 리바넬리)와 "그리스-터키 우호 협회"를 발족하였고, 또한 10년 뒤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영토분쟁으로 에게 해의 긴장이 지속되자 "평화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하고 1997년 6월 니코시아(Nicosia: 키프로스)의 '녹색국경'에서 공연했다.
 1992년 공직을 사임한 이래 세계평화와 인권운동을 멈추지 않고 클래식 작곡과 지휘에 전념하고 있다.
 데오도라키스는 교향곡, 오페라, 발레음악,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등 고전음악에서부터 영화음악과 1,000곡 이상의 가요들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기도 했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aino)>, 영화음악으로 영화감독 줄스 다생의 1962년<페드라(Phaedra)>와 1964년<그리스인 조르바(Zorba il Greco)>, 1969년 군부독재 당시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 감독의 와 <계엄령(Stage of Siege, 1972)>등이 있다.
 특히 <계엄령>의 OST는 칠레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깐토 헤네랄(Canto General: 모든 이를 위한 노래)"을 오라토리오로 만든 "깐토 헤네랄"에서 따온 명곡들로 구성돼 있다.
 (배윤경/음악평론가 민족음악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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