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시 모음 -김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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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시 모음 -김용화

김용화 0 4279
저자 : 김용화     시집명 : 먼길
출판(발표)연도 : 2017     출판사 :
눈길


어둑새벽 눈길 위엔
시묘 살던 서당 집 훈장 할아버지 짚신 발자국과
석유등 밝히고 새벽예배 간
천안할머니,
조그만 신발 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그 겨울


겨우내 하얀 눈이 쌓이는
고향 집 삼밭
캄캄한 구덩이 속에서는
샛노란 무 싹들이 세상 소식 궁금하다고
기지개를 켜며
새록새록
고개를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비 오다가 갠 날


젊은 엄마가 옥양목 앞치마
반듯하게 매고
부엌에서 손님 맞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

젊은 아버지가 원추리꽃 꺾어
소 귓등에 꽂아주고
무지개 뜬 산길 넘어
소 앞세우고 돌아올 것 같은,


귀가

 
인제는 가리, 은하 강 푸른 물결
하얀 쪽배 타고
청보리밭 사잇길 우마차 타고
필릴리- 필릴리-
하루 반나절 들어가면
우물가에 흰 닭이 울고
저녁연기 하늘로 긴 머리 풀어 올리는
탱자꽃 달밤에 화안한 그 집,
흰 무명 저고리 어머니가
아랫목에 더운밥 묻어 놓고
밤마다 젖은 눈 깜박이는 곳으로


감꽃 지는 마을


감꽃 피는 내 고향 가고 싶다
논두렁에 콩 심고
비 맞으며 깨 모종하고

장날이면 엄마랑 단둘이
등불 밝혀 들고
한내 장길 아버지 마중을 나가고 싶다
개구리 울음소리
가만가만 밟아가며

오늘같이 비 오다가 갠 날엔
앞산 뒷산 
나란히 잠든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깨워 일으키고 싶다


고향 산 베고 누워                                             


저물녘에 들려오는 오뉴월 무논의 개구리울음소리
건너말 외딴집 불빛 새로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
한여름 밤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
저녁나절 들려오는 먼 마을 닭 울음소리
보름도 갓 지난 초가을 우물 터서 들려오는
가늘고 기-인 풀벌레 소리 베고 고요히 저물고 싶다

   
눈 내리는 저녁


저녁 눈 설핏하게 떠도는 날은
고향마을 찾아들고 싶다
아이들 한바탕 떠들다 돌아가고
시누대 밭 참새들만 춥다고 조잘대던
저녁 어스름,
그 집 앞 지나다가
나풀대던 단발머리 보고 싶다
외양간에 늙은 소
숨 몰아쉬는 소리 들릴 듯하다


그 여름


홍수로 깊어진 대흥내를 건너
한낮의 뙤약볕 속을
열무단 이고 늙은 노새처럼 걸어오시는
할머니, 낮은 어깨엔
여치 풀무치 기름챙이도 함께 붙어왔다
소낙비에 전 베적삼에선 눅눅한 쉰내가 피어났다
보릿짚 후둑이며 아궁이 불 지피면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
수제비를 뜨셨다
해꽃은 꺾여 시드는데
쇠품팔러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장마 끝나고


장마 끝나고,
갈울내깔
징검다리 하나 둘 모습 드러내면
시냇물 맑아져 송사리 피라미 떼 줄을 짓는다
아랫내 물턱
큰물에 휩쓸려온 방개고무신 한 짝 걸려 있다
하늘이 높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버들붕어 한 꿰미씩 들고 곱돌모랭이 돌아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겨울 밤


오늘처럼 숫눈발 푹푹 쏟아붓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립 밖엔
하얀 눈 함뿍 쓰고 가을떡 돌리는 소녀가 있었다

더운 김 모락모락 오르는 방금 쪄낸
붉은 수수떡,

나풀거리는 석유등 불빛에
살짜기 드러난 그녀의 뺨도 한껏 상기된 밤이었다


청개구리의 노래
                 

터벅터벅 바짓가랑이 적시며 울 어매 마른 젖 파러 갈꺼나
구시렁구시렁 밤비는 저냥 내려 쌓는데
하늘 간 울 할매 명 치마 땟국 냄새나 맡으러 갈꺼나
구죽죽 구죽죽이
퍼붓는 밤비야


그리운 홍성


꼬불간 돌아서
은행나무
말무덤
금마천 살진 메기 물살을 친다
의사총을 끼고
숯거리 들어서면
장닭이 목청 뽑아 홰를 쳐 울고
아침볕에
조양문朝陽門
젖은 머리 말릴 때
월산 진달래
붉더라,
붉더라,


응봉국민학교


팔봉산 해 높이를 재며 시작되던
응봉국민학교,
무논에서 개구리가 라랴러려- 언문으로 울면
귀밑때기 새파란 아이들
입이 째지게 책 읽는 소리 들렸었지
측백나무 울타리 늦은 잠에서 깨어난 참새들
구구단 못 외워 벌 받는 아이처럼
살금살금 교실 안을 넘겨다보고
노오란 해가 눈썹 끝에 와서 걸리면
숙직실 부엌에서 강냉이죽 끓는 냄새가 솔솔
풍금 소리에 묻어오기도 했었지
운동장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엔
각시붕어, 모래무지, 꾸구리, 미꾸라지가
파들거리며 손안에 들어와 잡혀주고
봄비 오다 갠 날 운동장 늙은 벚나무에선
팝콘처럼 터지던 벚꽃,
전교생이 소낙비를 가려도 넉넉하던
플라타너스,
코스모스 화안한 신작로 길, 가을 운동회,
꼴찌를 놓친 적 없던 백미 달리기는
여학생들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작게 했던가
담임선생님 등에 업혀 소풍 가던 상국이,
국어책을 잘 읽던 똑똑한 윤수,
눈물이 많아 울보 별명을 붙이고 살던 착한 완수,
무릎 꿇고 벌 받던 개구쟁이 용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졸업생 답사를 읽어나가던
빨간 스웨터 혜진이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가
구렛나루 거뭇하던 영묵이, 덕회,
그리고 먹석골, 솔안말, 우체국, 청심당 약방도
지금 모두 잘 있는가, 잘들 있는가

# 충남 예산군 응봉면 소재 응봉초교의 옛교명



고향 집


고향 집 팔았단 소식 듣고, 사흘 밤낮
이불 덮어쓰고 잤네
꿈결에도 바람 타고 날아가 대문 밖
서성이며

달 그늘에 잠긴 뜨란 넘겨다 보다
낯선 개가 캉캉 짖어
슬금슬금 꽁무니를 내리며 돌아오고 말았네

밤마다 잠 못 들고 떠도는
발걸음아,
오늘 밤은 어느 낯선 마을  떠돌다
긴 그림자를 끄을며 돌아올꺼나

질라래비훨훨-
하루에도 몇 번씩 날개 돋친 새가 되어 날아가
엎드려 입 맞추고 돌아오는 곳,

인제는 새봄이 돌아와도
찾아오지 않는
식구 하나 더 늘어
샘봉에 쏙독새 밤을 새워 울어 쌓겠네


부루쌈*

                       
촌가 아낙들 밭일 허름해지면
꽁보리밥 한 덩이씩
앞치마 속에 꾸리고 가
이웃집 대청마루
치맛자락 훌러덩 걷어 올리고 둘러앉아

부루 여러 장을 겹쳐
밥 한 술에 묵은 된장 
숟가락 꼬챙이로 찍어 발라
부릅눈 뜨며 입안 가득 
욱여넣고

매운 고추 하나 질근 깨물면 눈물 글썽,
콧등엔 송송송
굵은 땀방울 맺히곤 했지

게으른 여름 해 꼬랑지가
싸리울에 걸릴 때까지 곯아떨어져
꿀잠을 자다가
일소 방울 소리 가찹게
다가오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돌아들 갔지
 
* '부루'는 '상추'의 옛말, 혹은 충청도 말.
  잎이 작고 쓴맛이 강함.
 

독골 엿장수


아침나절이면 엿가위 소리 짤깍대며
감꽃 피는 마을 찾아오던
독골 엿장수,
챙그랑- 책, 쨍그렁- 짤깍-
실속은 없었지만 언제나 다정한 아이들 친구였지
엿장수 궁디는 끈적끈적-
마른버짐 핀 머슴애들 데설궂어도
눈 한 번 끔벅이며
씨-익, 웃어 주면 그것으로 끝이었지
어쩌다 한잔 술에 어깨춤을 출 땐
복실이도 꼬리 치며 방울 흔들고
처마 끝 아슬한 낮달 웃음 참느라 눈물
질금거렸지
허드레 물건 지게 가득 짊어지고
구렛들 저녁 안갯속으로 묻혀가던 독골 엿장수,
유난히 춥던 그 겨울 마지막으로
가위 소리 들리지 않았지
챙그랑- 책, 쨍그렁- 짤깍-, 쨍그렁- 짤깍…


소금 동냥


간밤에 불장난을 하다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지도를 그려 놓았다
엄마는 잠자코 쪽박을 들게 하고 머리 위에 
키를 씌워 주었다
키 다리가 땅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며 졸졸 따라왔다
아침 해가 뜨고 낮은 초가지붕마다
하얀 박이 둥근 배를 안고 웃고 있었다
벗겨지는 키를 바투 잡고
미숙이네 높다란 대문을 넘어섰다
잘록한 개미허리에
옥양목 앞치마 맵시 나게 동여맨 미숙 엄마는
여느 때와 같이 살가운 표정으로
쪽박에 하얀 소금을 가득 채워 주었다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
-다섯 살씩이나 먹은 데린님이
워칙헐라구 허구헌 날 오줌을 싸유!
사정없이 부지깽이는 내리치고 있었다
울음보를 터트려 볼 틈새도 없이
종종걸음을 놓다 그만,
신발코가 돌부리에 벗겨지는 바람에
울음보가 터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 집 마당엔 할머니 고모 삼촌까지 나와서
얼굴이 터지게 웃음꽃을 피우고
뒤란 쏙쏘리감나무 꼭대기엔
까치가 날아와 맑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  


빨래터 풍경
 
 
구렛들 버드나무샘은 근처에서도
유명한 빨래터였다
여름엔 찬물, 겨울엔 더운물이
언제나 팡팡 솟아올랐다
아침나절이면 마을 아낙들
하얗게 둘러앉아 빨랫돌 하나씩 차지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워
아랫마을로 띄워 보냈다
나어린 계집애들 감꽃 목걸이 걸고
입이 째지게 동요를 불렀다
먼 들녘에서 장항선 완행열차가
한낮의 정적을 깨면
물무당도 덩달아 신이 나 힘차게
물살 가르며 매암을 돌았다
손등이 까만 개구쟁이들 어미한테 잡혀
엄살을 떨고
수세미로 닦달당한 손등은 어느새
배냇 손처럼 하얘지지만
하루만 지나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술심부름


빈 주전자 달랑 차고 술 심부름 가는 길은
대낮에도 꼬리가 아홉 달린 늙은 여우가
화장을 하고 나타난다는 길이었다
차돌백이 곱돌모랭이 지나다 땀이 나서 한 모금,
부엉이재 넘다 무서워서 또 한 모금,
방죽머리 뱀굴 돌아오다 속이 타서 또 한 모금,
빈 주전자 끌어안고
풀밭에 코를 박고 곤한 잠 빠져들 때
-이놈, 개산 노을에 벌겋게 타는구나!
매방앗집 연생 할아버지,
구루마를 끌고 가던 늙은 소도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귀향 보고서 1
-1996년 여름에


담비 쫓던 아버지 호두나무 밑에 잠든 순간에도
가장귀에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앉아
놈들은 호두알을 깨먹고 있었다
구름은 모이면 흩어질 뿐 심한 가뭄이었다
찌매미 옮겨 앉으며 목청 돋울 때
가을바람 한 솔기 마른 옥수숫대를 흔들고 지나갔다
매방앗간 할머니 자식들 먼저 보내고
빼곡히 배를 채운 암탉들만 수런거리며
알둥지를 찾고 있었다
참나무서피 박씨네 할머니
풍으로 누운 칠순 며느리 수발하랴 늙을 새 없었다
영숙이네 울안 잡풀 무성하고
주인 없는 나무에 족두리감이 오종종 달려 있었다


귀향 보고서 2
 -1999년 여름에


유월 하늘이 푸르고 푸르다
감잎에 햇빛 쨍쨍 빛난다
뒤란 가득 개망초꽃 하늘 떠받치고
더위 먹은 수국이
고갤 갸우뚱,
소담한 꽃 뭉치를 허공에 기대 본다
흐르던 시간도 잠시 몸 풀고
쉬어 가는 마을
할머니가 된 엄마 숨 몰아쉬며
솔밭 사이 열무밭에 가고
나 홀로 집 보며 시를 쓴다
청설모 한 마리 찾아와 빠꼼이
눈인사를 보내고
쏜살같이 시누대밭으로 숨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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