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시모음 -김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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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시모음 -김용화

김용화 0 1814
저자 : 김용화     시집명 : 먼길
출판(발표)연도 : 2017     출판사 : 시학

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너를 기다리며


너를 기다리기
백 년이
걸린다

너를 잊기까지
죽어서
또 백 년이
걸린다

나는 산정에 선
한 그루
나무,

하늘이 푸르다


 꼬마 시인


엄마- 달님이가 자꾸 나를 쳐다봐
괜찮아, 우리 애기 예뻐서 그래

엄마- 달님이가 나를 따라와
괜찮아, 우리 애기 함께 놀자고 그래

엄마- 달님이가 물에 빠지려고 해
울지 마, 달님이는 옷이 젖지 않아

세 살짜리 꼬마가
엄마 등에 업혀 소래포구를 건너간다


산길에서

 
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깊은 산 외딴 길섶에
한 송이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나리라
혹여, 그대가 한 번쯤
하찮은 실수로
바람처럼 내 곁을 머뭇거리다
지나칠 때
고갤 꺾고 꽃잎 한 장 바람결에 날려 보리라


먼길

 
한 사날-
진달래꽃 길을 따라 혼자 걸어서
그대 사는 먼 곳 외딴 그 오두막 찾아가 보고 싶네
폭설처럼 꽃 지는 저녁
길 위에 엎어져 영영 잠들어도 좋겠네
꽃신 한 켤레
허리춤에 달랑 차고

 
뒷걸음 이별


우리 둘은 이별을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
이별이
이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
너는 나
한 개 점으로 지워질 때까지


첫눈

 
저 하얀 눈
너의 긴 속눈썹 위에 사뿐 앉았다
사라져 버리던 눈
눈 깜짝할 순간만이라도 난 널
잡아 놓고 싶었었네
내 눈 속에


그해 겨울


너를 보내고
하늘 아래 보고 싶은 이름 하나 생겼다
네 하얀 이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내린 눈 위에 또 눈이 내려서 쌓인다
빈방에선 얼음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다


능소화

 
가까이 오지 마셔요
이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애오라지 단 한 분,
지아비 손끝에서만
피어나는 꽃이랍니다

제 몸에 대이는 순간
그예 당신은
눈이 멀고 말 것이어요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소한 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대일 것입니다


가을 편지


그녀에게서 날아온 편지가 가을비에
젖고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네요.
꼭꼭 눌러쓴 깨알 글씨가 
핑크빛 쪽지 속에서 꼬물거리고 있다
지웠던 생각들이 새록새록
미나리 새순처럼 머리를 쳐들었다
긴 머리가 젖고 있었다
체크무늬 짧은 치마도 할 수 없이 젖고 있었다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로
오목눈이 작은 새가 포로롱 날고 있었다
한 번 더 우리 사랑이
길 위에서 비 맞고
맨발 벗은 그녀가 울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읍내로 갈라지는 길목에 고갤 숙이고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불러도 답이 없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네요.
멀리 밤 기차가 가슴을 때리며 지나갔다


청주 여자


주머니 속에 주황색 벙어리장갑 한 짝
벗어 놓고 간
1961년생,
고속버스터미널 성애 꽃 눈 시린 차창 밖
펑펑 쏟아 붙는 눈발 속으로 아스라이
파묻혀만 가던


아무도 모르리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
70년대가 막 저물어가던 무교동이나 청진동 낚지골목 어디쯤
통금 사이렌 고막을 찢고 탐조등 불빛 긴 혓바닥 날름거리며
도심 한복판을 샅샅이 핥아내던 후미진 골목
페인트칠 희미한 긴 등받이 의자 비스듬히 기대앉아
우리 둘은 온몸이 달아 입술과 입술이 젖은 풀잎처럼 포개져
밤을 밝히고 있었다는 이 엄연한 사실만큼은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
다만, 밤을 새워 반짝이며 어깨를 토닥여 주던 저 별들밖에는


봄밤

 
보리술 씬냉이국에
그대 목소리 동동 띄워 맑은 귀로
담아내는

청복의


 
그 밤


젖가슴 봉긋 드러나 보이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고는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 한 마리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이번 여름엔 사랑을 하고 싶다

야한 티 하나 사 입고
낯선 여자와
낯선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낯선 거리에서 묻고 싶다



단풍은 붉다


그대와 단둘이 얼굴 붉히며 가을 빗속을
걸어가다가
낙엽처럼 포개져 함께 죽어도 좋으리


첫사랑 그 여자

 
남몰래
가슴 깊이 묻고 살아도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

한세상 살며
가슴 좀 실컷 아파 보라고
꿈길마다 찾아와
눈웃음치다

한 발짝
다가가면
살래살래 달아나 버리는

 
소녀를 위한 비망록

 
내 마음속 빛바랜 페이지 한 켠엔
눈 맑은 소녀 하나
우물가에 앉아 있다
몽당연필 침 발라 그려 놓은
지우개로 지워도
지지 않는 나의 페이지
이따금 바람에나 들켜 종잇장 팔랑이다
냉큼 돌아와 다시
옷깃을 접는 내 마음속 한 페이지


가을 편지

 
그녀에게서 날아온 편지가 가을비에
젖고 있었다
-단풍잎이 곱게 물들고 있네요
앵매기 발짝 같은 작은 글씨가
핑크빛 편지 속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지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미나리 새순처럼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갈래머리가 젖고 있었다
체크무늬 짧은 치마도 젖고 있었다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오목눈이 새가 포로롱 날고 있었다
한 번 더 우리 사랑이
길 위에서 비 맞고
맨발 벗은 그녀가 울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읍내로 갈라서는 길목에 고갤 꺾고
가만히 서 있었다
불러도 답이 없었다
다시 불러도 답이 없었다
-단풍잎이 곱게 물들고 있네요
멀리 밤 기차가 가슴을 때리고 지나갔다

 
강 건너 그대

 
하늘빛이 흐려서 손 한 번 헐겁게
잡아 보지 못했네
그리워 말 못하고 살아온 지
오랜 지금
강 건너 갈밭머리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쓸쓸히 웃고 섰는 여인아,
그대 향한 그리움 오늘도
겨울 강둑에
빈 해바라깃대처럼 서 있을 뿐이네


내 안의 여자

 
우체국 측백나무 사이로
바라보던
오렌지색 원피스가
고옵던 그녀

까마득한 세월 흘러갔어도
그 집 앞 지날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지

그날 읍내로만 따라 나왔더라면
지금 그녀는
곁에 있을 텐데
항상, 내 안에 있지

 
아름다운 이름 하나

 
하늘에 작은 별 하나
빛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밤 꽃들이 피어나
하늘길 밝혔을까

강가에 꽃 한 송이
피어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밤 별들이 반짝이며
강물 위에 빛났을까

하늘과 땅 사이
아름다운 이름 하나,

얼마나 더 많은 밤
잠 못 이루고
사무쳐야
내 가슴에 피어날 수 있을까


그 겨울의 끝


겨울의 끝에서 눈이 옵니다
지난겨울은 참 행복했습니다
연 사흘째
어지럽게 봄눈 날리고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보고
당신 보냅니다
당신만큼 날
슬프게 해 준 사람 없습니다
당신만큼 날
행복하게 해 준 사람 없습니다
봄눈 내리는 길목에서
멀어져 가는 당신 뒷모습
바라보다
한 움큼 눈을 뭉쳐 하늘에 던집니다

 
명희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까
캄캄한 어둠만 밀려오던
종점 근처
홍합 국물 따듯하게 뎁혀지던 포장마차,
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 오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산토끼처럼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을 눈매 곱던 널 찾아내어
빠알간 숯불에 알맞게 잘 구워진
꼼장어 소라 안주 삼아
독한 소주 한잔 빈속에 털어 넣고 널과 함께
세상 끝까지 걸어가다
눈 속에 포-옥 파묻혀 잠들고 싶어
그때, 우린
참 많이 젊어 있었지
강냉이 빵이 먹고 싶다던 너, 이 밤 어디에 박혀 있니


그때 그 자리

 
줄무늬 스웨터
빨간 치마

고갤 꺾고
마른 잔디 풀만 쥐어뜯던 네
작은 어깨가
조금씩
들썩여서

하고팠던 말
가득해도
말 한마디 못해 보고
돌아온
그때 그 자리,

인제는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너 없는
그 자리에
다시 찾아가 앉아 본다


능소화 사랑

 
단연코 잊지 않으리라
달빛 따서 덮어주던
그날 밤 그대 다순 손길

잠든 순간이라도 한 번만
살짝 다녀가오시라
귀로나 보일까나
눈으로나 들릴까나

천 개의 눈 깜작거리며
만 개의 귀 쫑긋대며
작두날 타듯 아스라이
맨발로 하늘 끝 기어오르다

사모침이 다하여
뎅강뎅강-
목을 버혀 떨구었고녀
담장 밑에 뒹구는 사랑아

 
해바라기 사랑


해를 맞듯
당신을 만납니다

해를 보내듯
당신을 보냅니다

오늘도 난
해바라기

지는 해를
바라보다
꽃잎 하나 떨굽니다

당신
뜰 앞에


애란

 
곱더군, 여전히-
달빛 호수에 얼비친 수선화처럼
그런데 왜 널 내가
냉큼 알아채지 못했을까 몰라
설마 해서였을까
빨강 파랑 신호가 바뀌는 순간보다 짧았던 만남,
이런 만남을 위해 먼길을 에돌아왔던가
또 한 번 봄이 흐릿하게 지나간다
손바닥 위에 날 뱉어 놓고 네게 보여줄 순 없을까
내 반쪽 떼 보내면 네 반쪽 받아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만 봄 하늘 꽃잎처럼
떠도는데 행여
지구가 쪼개져 멈춰 선다 해도
좋을 순간까지
안녕,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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