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하였다
이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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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4 21:23
저자 : 이향아
시집명 : 어머니 큰 산
출판(발표)연도 : 2012
출판사 : 시문학사
절하였다/이향아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TV를 철거하였다
당신의 연년생 손자들이 입시경쟁에 쫓기던 시절
횃불을 높이 쳐든 선봉대처럼 결연히 타이르던 그 목소리
막중한 내 불효는 날마다 한 가지씩 불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TV 대신 세계명작을 읽었다
오래 묵은 책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노신과 임어당과 토마스 하디와 펄벅을 깨웠다
그들과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그들의 주인공을 친구처럼 사귀었다
독후감 대회에 나갈 사람처럼 이름 적어 외웠다
테스-가엾은 처녀
알레크-불한당 같은 놈
에인젤-도련님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이 되더라"
어머니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노랫말을 적었다.
‘황포돛대’와 ‘고향무정’을 ‘사랑의 미로’와 ‘동백아가씨’를
연필로 정하게 눌러 적었다
어머니가 그 가사를 읽을 때면 시를 낭독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우러르기 눈이 부셨다
어머니!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살과 뼈로 자랐습니다.
당신의 딸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어머니
나는 절하고 또 절하였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TV를 철거하였다
당신의 연년생 손자들이 입시경쟁에 쫓기던 시절
횃불을 높이 쳐든 선봉대처럼 결연히 타이르던 그 목소리
막중한 내 불효는 날마다 한 가지씩 불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TV 대신 세계명작을 읽었다
오래 묵은 책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노신과 임어당과 토마스 하디와 펄벅을 깨웠다
그들과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그들의 주인공을 친구처럼 사귀었다
독후감 대회에 나갈 사람처럼 이름 적어 외웠다
테스-가엾은 처녀
알레크-불한당 같은 놈
에인젤-도련님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이 되더라"
어머니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노랫말을 적었다.
‘황포돛대’와 ‘고향무정’을 ‘사랑의 미로’와 ‘동백아가씨’를
연필로 정하게 눌러 적었다
어머니가 그 가사를 읽을 때면 시를 낭독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우러르기 눈이 부셨다
어머니!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살과 뼈로 자랐습니다.
당신의 딸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어머니
나는 절하고 또 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