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시 모음 -김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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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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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시 모음 -김용화

김용화 0 4807
저자 : 김용화     시집명 : 아버지는 힘이 세다
출판(발표)연도 : 1994     출판사 : 시와시학사
재분이


국어 시간이면
홍콩 아가씨를 불러주던 재분이
졸업한 후 한 번
소식 줄 줄 알았는데
아카시아꽃 내란처럼 피어나는 이 계절에
한 번 헤어지고 못 만나는 네가
그리워진다
작은 키에 커다란 눈
시골 출신
충청도 서산서 오빠 밥해 주러 올라와
학교에 다닌다던 재분이
지금쯤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 콩밭 매고 있는지
낯선 거리에서 비 맞고
서 있는지
교정의 새들도 자라서 날아가
한 번은 돌아오는데
우리 다시 만나
3학년 1반 교실에서
너의 노랫소릴 들어 보고 싶구나



란주를 위하여


성가병원 9층 13호실에 가면 란주가 있다
 
성장을 멈춘
한 송이 백합

가는 손등 바늘에 꼽혀
열아홉의 너는
누워서
잠시 쉬고 있다

해야
긴 그림자를 지우며
붉게 지는 해야

오늘 밤만이라도
돌아가는 시계를 멈춰 다오

창틀에 놓인 꽃들이
다투어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국어시간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
시를 사랑한다는 여학생들과
하나가 되는 국어시간
선생님 시해요 교과서는 따분해요
쉬는 화장실이나 혹은
요강 위에 앉아서나 해야 되는 거란다
까르르-
선생님은 너무 관능적이셔요
그래 인생이란 어차피
관능적이고 관능적이고 관능적인 거란다 관능이 뭔지
알기나 하니 조그만 것들이…
안 조그매요 선생님 컸어요 다 컸어요
얘도요 얘도요 얘도요
크긴 뭐가 다 컸단 말이냐 얘들이, 관능도
미적 승화만 된다면
훌륭한 예술이 되느니라 일테면
관능미란 것이 있고…
노트에 적어!



응봉국민학교


팔봉산 해 높이를 재며 시작되던
응봉국민학교,
무논에서 개구리가 라랴러려- 언문으로 울면
귀밑때기 새파란 아이들
입이 째지게 책 읽는 소리 들렸었지
측백나무 울타리 늦은 잠에서 깨어난 참새들
구구단 못 외워 벌 받는 아이처럼
살금살금 교실 안을 넘겨다보고
노오란 해가 눈썹 끝에 와서 걸리면
숙직실 부엌에서 강냉이죽 끓는 냄새가 솔솔
풍금 소리에 묻어오기도 했었지
운동장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엔
각시붕어, 모래무지, 꾸구리, 미꾸라지가
파들거리며 손안에 들어와 잡혀주고
봄비 오다 갠 날 운동장 늙은 벚나무에선
팝콘처럼 터지던 벚꽃,
전교생이 소낙비를 가려도 넉넉하던
플라타너스,
코스모스 화안한 신작로 길, 가을 운동회,
꼴찌를 놓친 적 없던 백미 달리기는
여학생들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작게 했던가 
담임선생님 등에 업혀 소풍 가던 상국이,
국어책을 잘 읽던 똑똑한 윤수,
눈물이 많아 울보 별명을 붙이고 살던 착한 완수,
무릎 꿇고 벌 받던 개구쟁이 용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졸업생 답사를 읽어나가던
빨간 스웨터 혜진이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가
구렛나루 거뭇하던 영묵이, 덕회,
그리고 먹석골, 솔안말, 우체국, 청심당 약방도
지금 모두 잘 있는가, 잘들 있는가

 *충남 예산군 응봉면 소재 응봉초등학교 옛 교명



낙화


목련꽃 지는 토요일 오후
내 청춘을 묻은 교정에
빛바랜 세월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손끝에 잡히는 것들
주워 모아
풀꽃 같은 이름 하나씩 붙여 보다
바람에 날려 보내고

남은 몇 개
책갈피 속에 끼워 가방에 담았다

바람은 점점 난폭해져
소녀들 치맛자락을
말아 올리고
꽃 지는 하늘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개학날


유지매미가 지지징- 지지지이잉- 울고 있었다
쓰르라미가 쓰르람- 쓰르람- 울고 있었다
참매미가 맴, 맴, 맴, 매- 맴- 울고 있었다
애매미가 쑈시쑈시 쑤꾸쑤꾸찌- 울고 있었다
국어 시간에 여학생들이
까르르- 까르르-
책상을 두드리다 눈물 질금, 끝내 울어 버렸다



쓸쓸한 날의 자화상


빠른 게 세월이더라,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 늬들을 멀리하기 전에
늬들이 먼저 나를 멀리하는구나
스물아홉에 밀리고
총각한테 밀리고
그렇지만 아이들아 나도 20년 전엔 스물아홉,
향기 나는 청춘이었단다
교문 밖 나설 땐 겹겹으로 에워싸고
인기투표할 때마다
첫째를 놓친 적 없었단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바보 천치 같은 아이들아



명희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까
캄캄한 어둠만 밀려오던
종점 근처
홍합 국물 따듯하게 뎁혀지던 포장마차,
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이 오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산토끼처럼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을 눈매 곱던 널 찾아내어
빠알간 숯불에 알맞게 잘 구워진
꼼장어 소라 안주 삼아
독한 소주 한잔 빈속에 털어 넣고 널과 함께
세상 끝까지 걸어가다
눈 속에 포-옥 파묻혀 잠들고 싶어
그때, 우린
참 많이 젊어 있었지
강냉이 빵이 먹고 싶다던 너, 이 밤 어디에 박혀 있니 



도시락을 먹으며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
가을도 깊은 날
중년의 낯선 사내 하나 빈 교무실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혼자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잃어버린 나를 찾은 것 같다

시골 학교
무성하던 플라타너스 아래 푸른 꿈 키우던
까까머리들은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밥을 많이 흘리던 놈
꽁보리밥만 싸오던 놈
여학생 도시락만 홈쳐 먹던 놈

낯익은 소년 하나,
교무실 구석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길 선생


역사를 가르치는 길 선생은 불온하다
침을 튀기며 하루 종일
학생들 앞에서 핏대를 올리고
불온한 미소를 짓고
퇴근 후엔 고바우 선생을 만나 외상술을 마시고
박봉인 주제에
봉준이가 긋고 간 술값을 갚아주고
건하게 취하면 영감한테 시비를 붙고
멱살을 잡고 수염을 뽑고 홧김에
한강에 가 오줌을 눈다 부르르 떨며
보아라, 사회면 톱기사에 비친 불온한 그의 얼굴
학생들은 홀짝이고
잘난 학부모들 전화질하고
유식한 동료들 멸시를 한다
안경 고쳐 고쳐 쓰고
교정을 떠나던 뒷모습은 더욱 불온하다



학교를 떠나며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지난겨울은 춥고 길었다
귀밑머리 새파란
총각 선생으로 왔다
오늘은 반백이 되어 혼자 짐을 싼다

책상 비우고 사물함 비우고
노트북을 비우고
낡은 슬리퍼가 들어앉은 신발장을 마지막으로 비우고
책이며 앨범이며 교무 수첩이며
33년 세월 때가 켜켜이 앉은 소지품들
보자기에 나누어 꼭꼭 싸맸다

그동안 내 곁에서 날아간 풀꽃 같은 이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방울방울
유리창에 아롱지며
흘러내리는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동료들 뒤로하고
뚜벅뚜벅………
긴 복도에 마침표를 찍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교정의 나무들 젖은 어깨 들먹이며 거기 서 있었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학부모회의가 열리던 날 벌을 서고 있었다
청소를 빠져나가 칠판 밑에 무릎 꿇고
킬킬대던 우리 반 계집애들 향해 입술 지그시 깨물며
양손을 번쩍 쳐들고 있었다
누군가 창밖에서 어른거렸다
활짝 문이 열렸다
-저게, 저게 우 우리 손자유우, 손자!
……
대신 회의에 참석하셨다
공부하는 손자 모습 살짝 보고 가려고
물어물어 찾아오신 할머니
붉어진 눈시울엔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선생님은 퍽 난처한 표정으로
‘참, 곤란하게 됐습니다’를 연발하셨으나
귀가 어둔 할머니 알아듣지 못하시고 벌 받는 손자
'곤란'이란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에 가 앉게 하시고
선생님은 풍금 앞에 앉아 마른땀 닦으며
'아침 바다 갈매기'를 치셨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가요~
눈물이 자꾸 새어 나왔다




겨울, 소명원에서*


겨울, 소명원엔 설레는 숨결이 있다
땀내 나는 노동의 휴식과 단호한
자연의 질서가 있다
낮게 낮게 흐르는 마른 풀잎의 향기
한 잎 두 잎 가을을 벗고
마침내 완성되는 겨울나무의 자태

천상의 열매를 돌려주고
가난한 들쥐 다람쥐한테도 돌려주고
상처투성이 빈 가슴
집 없는 생명들의 편안한 겨울잠을 위해
억센 옹이로 버텨 서서
한 해 자란 키를 재 보는 나무의
크고 넉넉한 마음,
새들이 몇 번이고 가지를 옮겨 앉는다

겨울, 소명원은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빈 곳간에 송곳니를 가는 다람쥐들은
쳇바퀴를 돌리며
어떻게 어떻게 겨울을 인내하는가
높다란 가지 끝에 뒤웅박을 걸어 놓고
벌들은 왜 찬바람에 흔들려 보는가
겨울나무는 어떻게
꽃보다 아름다운 눈꽃을 피워내는가

건강한 노동으로 단련된 가슴만이 뜨겁게
겨울 속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고
겨울, 소명원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발목을 떠는 새들,
마지막 햇살 한 땀씩 따 먹고
숨찬 날개 부딪쳐 겨울 속을 날아오르고 있다


* '소명원'은 부천시 소사구 원미동 소재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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