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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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넘어서

오애숙 2 608
저자 : 은파 오애숙     시집명 : *http://kwaus.org/asoh/asOh *
출판(발표)연도 : *     출판사 : *
한계령 넘어서

                                  은파 오애숙

소슬바람 불어올 때
삶의 잔해 바람결로
깡통 구르는 소리와
낙엽 태우는 소리에
한계령 넘는 반사체

늘상 내면의 현실엔
아귀다툼하는 문제
긍정꽃의 적당이가
부정의 사윈 동산속
불도저로 판 벌인다

허나 가끔 눈 먼 새
새장 걷어차고 나와
창망의 허공속에서
이리저리 뛰어 날아
美친세계 구축 하려

도전 의식에 춤추며
따사론 들숨 날숨에
화해 장 열어 손잡고
그 쓰디쓴 잔 마시네

꿈꾸던
유토피아를
건설위한 일념에
2 Comments
오애숙 2019.10.07 17:02  
한계령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계(限界)가 아니라 차가운 시내라는 뜻이다.
 차디찬 계곡이라는 뜻의 한계령(寒溪嶺)을 넘지 못하는 일정한 범위라는 뜻

실제 한계령을 넘어 보지 못했으나 그 의미를 사유체로 걸러 시어로 착용함
오애숙 2019.10.07 17:08  
한계령 길은 언제부터 사람이 다니기 시작했을까.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양양인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한계령 길이 나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에 기록된 것이 최초인 듯싶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44년 당시 몽고군은 철원, 춘주(현 춘천),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진격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춘주성의 항복소식을 듣고 인제 지역 백성들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피난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한 한계령이 조선 초기에는 험하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1400년대에서 1500년대 사이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편에서는 한계령을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적고 있다. 즉,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1481년 이전에 한계령 길을 폐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사유는 증보문헌비고에 나와 있다. 증보문헌비고 중 미시령을 설명한 부분을 보면 ‘조선 성종조에 양양부의 소동라령(所冬羅嶺, 현 한계령)이 험액(險阨)이라고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폐쇄했다고 해서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750년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백두대간 강원도 지역의 령 여섯 개 중 하나로 오색령(현 한계령)을 손꼽았으니, 험하다 해서 다니지 않았던 것은 조선 왕실과 양반 사대부일 뿐, 민초들은 1971년 현재의 한계령 포장도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한계령 오솔길을 통해 백두대간을 넘나들었다.

현재의 한계령 도로는 1968년 김재규가 사단장으로 있던 1102 야전 공병단에서 착공하여 1971년 완공하였다. 한계령 도로의 완공을 기념하여 한계령 108계단 위에 있는 설악루라는 정자 옆에 공덕비를 만들었으며 “설악루”라는 현판은 김재규 당시 사단장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해온다.

이러한 한계령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아마 1984년 시인과 촌장이 처음 불렀고, 양희은씨가 1985년에 다시 부른 노래 “한계령”(작사: 정덕수) 때문일 것이다. 계간 <시인세계>에서 2004년 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글 짓는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5위에 뽑힐 정도로 가사가 시적이며 서정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는 노래 “한계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계령”을 부른 양희은씨는 이 노래를 부른 지 10년이 지나서야 한계령에 처음 와 봤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양희은씨에게 ‘사기’라고 했단다. 그럴 때마다 양희은씨는 ‘그럼 연극배우들은 암환자 연기할 때 암 걸려보고 하냐’며 대꾸하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계령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소동라所東羅, 그녀의 이름이었다. 서른 하나, 그녀의 나이였다. 현수(絃首, 코머리),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었다. 양양 고을의 관기, 그리고 그 우두머리. '천첩의 기명을 소동라령(현 한계령)에서 딴 것은 실로 외람된 바가 적지 않사온데, 여짜오면 내륙의 길손은 원통역으로부터 반드시 소동라령을 넘어야만 비로소 설악에 이를 수가 있사옵고, 또 설악을 거쳐서 본읍에 당도하셔도 마땅히 천첩의 수발을 넘어야만 마침내 양양을 보았다고 하리라 하여 기명으로 정했던 터입니다. 하오나 나리께서는 바야흐로 천첩의 시험을 넘으신 듯하옵기에 감히 아뢰오니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쓴 <매월당 김시습>의 한 장면이다. 물론 양양 고을의 기생으로 나오는 소동라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김시습과 수작하는 기생의 이름으로 한계령의 옛 지명인 “소동라”를 붙이고, ‘소동라령을 넘어야만 양양과 설악에 다다를 수 있고, 소동라의 수발을 넘어야만 마침내 양양을 보았다’고 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김시습이 살았던 15세기에는 한계령을 “소동라령(所冬羅嶺)”이라 하였다.

문헌상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소등라령(所等羅嶺)”이다. 소등라령을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바드라재’로 번역하였다. 속초여고 주상훈 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바드라'였다. 이 바드라를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이두식으로 소등라(所等羅)라고 표기하였다가, 그 후 조선시대 읍지류에서 발음상 편한 소동라(所冬羅)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 문헌인 택리지, 대동여지도,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전부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와 같이 한계령으로 명명된 것은 1968년 공병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인제쪽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인제군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 하였다.

삶이 몹시 힘들거나 지칠 때면 문인들처럼 한계령에 올라 나의 한계를 곱씹으며 다시 극복할 기운을 회복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