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누르다
이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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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2 21:38
저자 : 이향아
시집명 : 온유에게
출판(발표)연도 : 2014
출판사 : 시와시학
도장을 누르다/이향아
도장을 누르라고 문서를 들이대면
가슴이 알고 먼저 눌린다
옛날 사글세 자취방을 계약할 때부터
모처럼 내 집을 장만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몰래 선산을 팔아먹는 것처럼
혈서라도 쓰는 것처럼
핏방울 맺힌 손가락
가끔은 헛것이 둔갑하는 요지경에 속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도장을 누른다
오래 쓰셨네요
그 사람이 내 도장을 보고 감탄하였다
예, 50년은 넘었을 겁니다
나는 마치 역사의 길이로 한 가락 덤빌 것처럼 말했지만
오래된 것의 향기를 그도 알고 있을까
오래된 것들의 눅눅한 그늘
그늘 속에 숨은 동록과 이끼
허물없는 관계를 아는지 몰라
오래된 것이 아직 소용은 있는지 몰라
그 사람의 도장은 크고도 묵직했다
까닭 없이 주눅 들어 울렁대는 가슴
앞뒤로 흔들면서 인감도장을 눌렀다
많이 닳아 벌겋게 힘을 줘야 했다
도장을 누르라고 문서를 들이대면
가슴이 알고 먼저 눌린다
옛날 사글세 자취방을 계약할 때부터
모처럼 내 집을 장만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몰래 선산을 팔아먹는 것처럼
혈서라도 쓰는 것처럼
핏방울 맺힌 손가락
가끔은 헛것이 둔갑하는 요지경에 속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도장을 누른다
오래 쓰셨네요
그 사람이 내 도장을 보고 감탄하였다
예, 50년은 넘었을 겁니다
나는 마치 역사의 길이로 한 가락 덤빌 것처럼 말했지만
오래된 것의 향기를 그도 알고 있을까
오래된 것들의 눅눅한 그늘
그늘 속에 숨은 동록과 이끼
허물없는 관계를 아는지 몰라
오래된 것이 아직 소용은 있는지 몰라
그 사람의 도장은 크고도 묵직했다
까닭 없이 주눅 들어 울렁대는 가슴
앞뒤로 흔들면서 인감도장을 눌렀다
많이 닳아 벌겋게 힘을 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