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가을메모
뜨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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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9 00:37
저자 : 강희창
시집명 : 하늘바람별
출판(발표)연도 : 2002
출판사 :
.
수 덕 사 가 을 메 모 / 강희창
1. 전설
마늘 각시 덕숭낭자
수탉 벼슬 수덕도령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은
하얀 버선꽃으로 피어 성심을 말하거늘
싸울아비들아 그 신성한 정토에
어찌하여 창칼을 들며
어찌하여 오욕을 놓느냐
나라만 위한다면 모두 선이더냐
나무 삭정이 꺽듯 목을 베고 버였지
경허, 만공스님이 그 업을 대신했구나
2. 대웅전
말없이 한자리에 칠백년 배가 흘러 기둥은 든든하다
평안히 좌대에 앉아 긴긴 세월 이 땅을 지켜보노니
배 흘러내리듯 가뿐히 내려트린 산자락
벼바슴 날 잡아 누렇게 드러누운 들자락
내포 땅을 그리 길들이고 그리 먹여 살렸구나
중턱까지 끌어올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이유 알리라
전 뜰에 느티나무 한껏 머리 조아려 하 세월 합장한 임은
본당 부처가 아니라 묵묵히 받쳐 온 들보와 기둥님이라
독경소리, 목탁소리 쓸데없다
소슬바람아,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3. 여승당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여승 홀로 울적에......
비구인지 비구닌지 구별마소
내 청춘 불사를 곳
환희대, 금선대 아니어도 좋으니
덕숭총림을 들고 나는 젊은님네
내 모습 맘대로는 상상마오
다시 태어날 땐 여자로는 아닐 터이니
4. 수덕여관
수난의 세월 살며
추억뭉치 착착 쟁여 놓은 초가 객관
평생 내 생각만 그리다 간다
나혜석, 이응로 그 이름은 잊어다오
너희 스스로 알아서 사랑하며 살겠지만
내가 가졌던 거 다 필요 없다
조강지처가 뭐며 자식에 낭군도 놓았니라
머물렀던 추억은 암각하지 말 것
돌에 뱉은 내 소망만 흔적으로 남아 있으라
5. 하산길에
벌써 찬바람 속 나무들 월동준비하느라 분주한데
덕숭산 그늘에 지펴온 목숨
널어 놓은 더덕처럼 쭈그렁 노파보살이
좌대 대신 좌판에 앉아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돈부 한 뎃박, 산나물 여남은 묶음, 도토리 말 가웃......
어금니처럼 자란 분신들이야 어디서들 잘 살겠지
내가 짐이 될 수는 없음이라
남들은 급작스레 가기도 잘 가드만
마른 고사리 같은 이 질긴 목숨이랴
모두 버리고 훌쩍 갈 것이니라
나그네여 인연 한푼 주시고
여기 인연 한 보따리 가져 가슈
그 보살 떠나고 나면 무덤에 하얀 버선꽃 피려나.
(2002)
수 덕 사 가 을 메 모 / 강희창
1. 전설
마늘 각시 덕숭낭자
수탉 벼슬 수덕도령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은
하얀 버선꽃으로 피어 성심을 말하거늘
싸울아비들아 그 신성한 정토에
어찌하여 창칼을 들며
어찌하여 오욕을 놓느냐
나라만 위한다면 모두 선이더냐
나무 삭정이 꺽듯 목을 베고 버였지
경허, 만공스님이 그 업을 대신했구나
2. 대웅전
말없이 한자리에 칠백년 배가 흘러 기둥은 든든하다
평안히 좌대에 앉아 긴긴 세월 이 땅을 지켜보노니
배 흘러내리듯 가뿐히 내려트린 산자락
벼바슴 날 잡아 누렇게 드러누운 들자락
내포 땅을 그리 길들이고 그리 먹여 살렸구나
중턱까지 끌어올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이유 알리라
전 뜰에 느티나무 한껏 머리 조아려 하 세월 합장한 임은
본당 부처가 아니라 묵묵히 받쳐 온 들보와 기둥님이라
독경소리, 목탁소리 쓸데없다
소슬바람아,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3. 여승당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여승 홀로 울적에......
비구인지 비구닌지 구별마소
내 청춘 불사를 곳
환희대, 금선대 아니어도 좋으니
덕숭총림을 들고 나는 젊은님네
내 모습 맘대로는 상상마오
다시 태어날 땐 여자로는 아닐 터이니
4. 수덕여관
수난의 세월 살며
추억뭉치 착착 쟁여 놓은 초가 객관
평생 내 생각만 그리다 간다
나혜석, 이응로 그 이름은 잊어다오
너희 스스로 알아서 사랑하며 살겠지만
내가 가졌던 거 다 필요 없다
조강지처가 뭐며 자식에 낭군도 놓았니라
머물렀던 추억은 암각하지 말 것
돌에 뱉은 내 소망만 흔적으로 남아 있으라
5. 하산길에
벌써 찬바람 속 나무들 월동준비하느라 분주한데
덕숭산 그늘에 지펴온 목숨
널어 놓은 더덕처럼 쭈그렁 노파보살이
좌대 대신 좌판에 앉아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돈부 한 뎃박, 산나물 여남은 묶음, 도토리 말 가웃......
어금니처럼 자란 분신들이야 어디서들 잘 살겠지
내가 짐이 될 수는 없음이라
남들은 급작스레 가기도 잘 가드만
마른 고사리 같은 이 질긴 목숨이랴
모두 버리고 훌쩍 갈 것이니라
나그네여 인연 한푼 주시고
여기 인연 한 보따리 가져 가슈
그 보살 떠나고 나면 무덤에 하얀 버선꽃 피려나.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