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 최영미

홈 > 시 백과 > 시인의 시
시인의 시
 
* 특정 종교나 정치.사상, 이념에 치우친 작품과 다수 회원이 삭제를 요청하는 글은 양해없이 삭제되거나 개인게시판으로 옮겨집니다.
* 저자난에는 이름만 사용해야 하며, 별명이나 아호 등을 사용해 등록자 이름과 저자(시인)의 이름이 달라지면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 모두를 위하여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연속해서 올리는 것은 지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목록의 등록자 이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시면 해당 등록자가 올린 작품을 한번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 검색시에는 리스트 하단 <다음검색>버튼으로 나머지 검색 결과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 최영미

관리자 0 7030
저자 : 최영미     시집명 :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1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이 진부해졌다
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랑이 진부해졌다

위의 두 문장 사이엔 어떤 논리적 연관도 없습니다
다만

2

예언자들의 더운 피로 통통히 살진 밤, 일요일 밤의대행진처럼
나도 소리내 웃고 싶지만 채널을 돌리면 딩동댕, 지난 여름이
자막과 함께 우연히 흘러가고 담배연기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서른을 통과한 이들은 모두 만만찮은 얼굴을 하고
적들도 우리처럼 지쳤는지 계속 쫑알대고, 빨아 헹굴 어떤
끈적한 현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세탁기 열심히 돌아가고
딩동댕, 시체처럼 피곤해지는 밤이 몰려 온다

3

빨간 고무장갑만 보면 여자는 무서워 아 악 악을 써도
소리가 돼 나오지 않는 혼자 있는 빈집, 귀신이닷!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든 귀신이 손만 보이는 투명인간이 쓰으윽 일어나 피 묻은
손으로 목을 휘감을 것 같아
숨이 막혀 헉 헉, 못살겠어요 뭐라구? 헤어지자구? 등뒤에서
하나 둘 창문이 스르르 닫히는, 혁대가 딸각 풀어지는 소리 헉 헉,
그러나 결코 말로 번역될 수 없었던 말들, 때리지 마 제발 때리지만
말아요 도둑맞은 첫사랑이 부패하기 시작하는 냄새 진동하던 그 여름의
오후, 그것도 세월이라고, 기억을 통과한 상처는 질겨져 있다
저기 저 방충망 바깥에서 윙윙대는 모기처럼 지금은 더이상 위험할 것도 없는 데...... 다만 나오던 땀이 도로 들어가고
다만 설거지그릇이 달그닥거리고

4

요즘은 통 신문 볼 시간이 없어
살아남은 자들은 예언자의 숱 많던 머리칼을 자르고 자기만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책임질 수 있는 것만
책임지려 하고, 바야흐로 총천연색 고해의 계절, 너도 나도
속죄받고자 줄을 섰는데....
그러나, 그러나 아직도 골방에서 홀로 노래를 만드는 이 있어
바다, 끓어오르고 산, 넘어지고 시퍼렇게 술, 넘쳐흐르고 딩동댕.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분다니까!

5

(조금씩 자주 흔들리는 게 더 안전해)
일천구백원짜리 마마손 장갑이 내 속을 뒤집어놓고
아픈 내가 - 내게 아직도 아파할 정열이 남아 있던가 - 다시
장갑을 뒤집는다 채도가 떨어진 붉은색은 더이상 피를 흘리지
않아, 장미빛 인생을 약속할 것 같아, 분홍도 빨강에서 나왔으니, 그러나
다시는 속지 않으마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부해져 썩는 냄새, 곶감 터지듯
하늘 벌어지고 떨어진다 떨어진다
아 - 누가 있어 밑에서 날 받쳐주었으면
0 Comments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