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싸우다 - 전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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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싸우다 - 전남진

관리자 0 4806
저자 : 전남진     시집명 : 나는 궁금하다
출판(발표)연도 :     출판사 : 문학동네
비어버린 빌딩 속 밤사이 停戰
점령할 대륙을 살피러 나온 말하는 컴퓨터
책상은 점령당했어. 변절한 문자들 욱, 쏟아질 것같이 메스꺼운, 특히
抗戰의 흔적이 없는 계산기, 달력, 일력, 전화기 위에 떡 버티고 누운 숫자
월급 숫자가 줄어든 것에 대해
저항을 포기한 몇몇이 모여 술을 마셨다. 술은 저항을 포기한 자의 식량
얼마 후 편지를 가장해 쳐들어온 카드대금 결제 통지서
숫자는 희미하게 비웃고 있었어
아내마저 숫자의 편이 되어 공격한 그날. 잘못했어, 잘못했다구

문맹의 시절. 진달래 입 가득 분홍 꽃말 날리며 뛰노는 소년에서 길을 묻는 표준말. 되묻다 그냥 가는 표준말, 을 바라보던 열한 살 사투리

출근하자마자 결재판을 타고 덤벼드는 숫자. 숫자의 공격력은 갈수록 첨단화된다
역습을 위하여, 은밀히 양심을 판 숫자를 돈으로 바꾼다
양심이여 잠시 쉬고 있어라. 전쟁은 이긴 자를 위해 역사를 마련해두지 않았던가

넌 어려서부터 착했단다. 항상 착하게 살아야 하지. 꼭 서울로 가야겠니?
힘들면 아무 때고 내려오거라, 오거라, 오거라…… 어서 가거라. 뒤돌아보면 눈물 감추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던…… 힘들어요 할머니

가을이 왔어. 숫자들이 살찌기 시작했어. 붉은 날에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아. 공휴일마다 길에 버려지는 숫자들. 할머니. 어디 가세요. 나를 데려갈 숫자가 오고 있어. 따라가시면 안 돼요.

숫자는 모래 같은 거야. 결국 누구도 모두를 셀 수는 없어

할머니, 꽃부터 피운 봄 한나절 꽃상여 타고 가시는 할머니

얘야, 이제 싸우지 말아라. 상대를 봐. 이길 수 없잖아. 술이나 부어 잔 비었어. 그만 마셔 술값 모자라. 차비 좀 빌려줘. 표준어로 달려오는 마지막 전철, 앗, 결재판, 양탄자, 너무 취했어. 문 닫을 시간 넘었어요. 아니, 아직 문 닫을 시간이 아니야. 싸움은 끝난 게 아니라고. 이렇게 싱거운 게임이 아니었어. 다시 해, 다시 하자구

활활 타오르는 꽃상여. 모두 태우고 가시는, 할머니. 얘야 아직도 싸우고 있니?
불쌍한 내 새끼…… 아무 때나 내려오렴, 오렴, 오렴…… 싸움이 끝나면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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