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 박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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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 박진용

박진용 0 1191
저자 : 박진용     시집명 : 내 영혼의 빙하시대 - 유화운(외)
출판(발표)연도 : 2003.3     출판사 : 푸른미디어
우물

박 진 용


돌아보면 시작이 없고 내다보면 종말이 없고 둘러보면 여기
가 어딘지 내 것이 없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혹시라도 이곳에
숨어 있을까 눈을 감고 얼을 모아 마음을 한껏 밝혀보나 이곳도
무(無), 다만 턱도 뚜껑도 없는 우물 하나 있어 그 일그러진 입
을 내 가슴에 들이대고 제 속을 보여준다 이곳도 또한 무, 앞뒤
도 흑백도 없는 원형의 어둠이 무거운 침묵의 중력으로 아래로
침강하고 아! 초록 이끼로 얼룩진 두레박 하나 절로 힘에 겨워
제 줄을 탁! 치고 우물속 어둠으로 뛰어들어 세찬 가속으로
하강한다 이제 온갖 크고 작은 충격의 파동이 어둠에 번지고
창세의 원죄로 나의 역사를 이곳에 머물러 살아온 수많은 선악
나무 열매의 작은 세포들이 충격의 파동에 무참히 파열하여 뜨
겁게 끈적이는 원형질을 사방으로 튀기며 죽어가고 빈 껍질로
쌓이는 저들의 차가운 시체가 턱도 뚜껑도 없는 우물을 채우고
넘쳐흘러 깨알같이 영근 작은 침전물로 내 가슴에 알알이 박혀
뽑을 수 없는 아픔의 씨를 남긴다 이곳에 오래 지체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망각의 고행길을 가게 되리라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니 여전히 시작도 종말도 보이지 않고
다만 턱도 뚜껑도 없는 우물이 그대로 있어 그 일그러진 입으로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강물 소용돌이치며 흘러들게 하고 바람에
날리는 수없이 많은 낙엽들 사뿐사뿐 춤추며 날아들게 하고 넓고
푸른 가을 하늘 큰 회오리바람으로 포근한 솜처럼 길게 꼬리
늘이며 빨려들게 하는데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니 그래 저들
의 침묵 때문에 돌아서지 못하고 또 한 해의 가을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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