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얼굴 1
poem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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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1 10:42
저자 : 장석남
시집명 :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출판(발표)연도 : 1999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돌의 얼굴 1
장석남
어느 하루 홍예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수만 개의 돌을 쌓아 만든 홍예문 아래를 지나다가 그 많은 돌의 얼굴들 중에서 나는 한 가지 얼굴과 눈이 맞고 말았습니다 아주 가늘은 햇살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는 그 가늘은 숨결 하나가 내 이마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타고 발끝으로 새어 내려갔습니다 이 홍예문이 선 게 백년 남짓이니까 그 돌이 그 자리에서 그 눈빛을 쏟아낸 게 그만한 세월일 것인데 여전히 그 빛 생생하게 내 몸 속에다가 그 긴 세월의 그리움 치레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내 내 걸음은 그 자릴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그 돌로 걸어 들어가듯 어딘가로 걸어 들어가서 홍예문 아래를 지나가는 색시들이나 옷깃이 서걱이는 새아이들, 손 시리게 피어 있는 이른 봄꽃들을 바라보듯 앞바다를 바라보고 또 보곤 하였습니다 집에 와서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지나 다시 그 자릴 지나다가 그 돌을 보았더니 웬일로 거기엔 온통 신 사탕을 가득 문 봄바다의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해 봄에 그 바다로 누가 걸어들어간 걸까요 걸어나온 걸까요 나는 홍예문을 지나면서 그 돌 틈에 난 담쟁이덩굴이나 쑥부쟁인지 뭔지 하는 풍에 내 눈빛을 걸어두고야 그곳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장석남
어느 하루 홍예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수만 개의 돌을 쌓아 만든 홍예문 아래를 지나다가 그 많은 돌의 얼굴들 중에서 나는 한 가지 얼굴과 눈이 맞고 말았습니다 아주 가늘은 햇살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는 그 가늘은 숨결 하나가 내 이마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타고 발끝으로 새어 내려갔습니다 이 홍예문이 선 게 백년 남짓이니까 그 돌이 그 자리에서 그 눈빛을 쏟아낸 게 그만한 세월일 것인데 여전히 그 빛 생생하게 내 몸 속에다가 그 긴 세월의 그리움 치레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내 내 걸음은 그 자릴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그 돌로 걸어 들어가듯 어딘가로 걸어 들어가서 홍예문 아래를 지나가는 색시들이나 옷깃이 서걱이는 새아이들, 손 시리게 피어 있는 이른 봄꽃들을 바라보듯 앞바다를 바라보고 또 보곤 하였습니다 집에 와서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지나 다시 그 자릴 지나다가 그 돌을 보았더니 웬일로 거기엔 온통 신 사탕을 가득 문 봄바다의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해 봄에 그 바다로 누가 걸어들어간 걸까요 걸어나온 걸까요 나는 홍예문을 지나면서 그 돌 틈에 난 담쟁이덩굴이나 쑥부쟁인지 뭔지 하는 풍에 내 눈빛을 걸어두고야 그곳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