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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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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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poemlove 4 14700
저자 : 곽재구     시집명 : 사평역에서
출판(발표)연도 : 1983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들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4 Comments
석양 2005.08.16 04:12  
중간에 문장이 빠졌네요. 수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8~9행의
'한 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밑에서 4번째 행 '몇 앞'은 '몇 잎'의 오자겠지요...

항상 좋은 시를 올려주셔서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가을 2006.01.09 21:54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가을 2006.04.01 14:37  
시의 화자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시행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여행은 조금은 쓸쓸하고 우울한 편이다. 이 시를 모티브로 하여 시인의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는 비슷한 제목의 단편을 쓴 바 있는데, 그 소설에서 1인칭의 화자가 수배중인 운동권 대학생이었음을 참고하면 이 시를 재미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어쨌든 그가 어두운 분위기의 여행을 하고 있음은, 제 7·8연의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라는 서정적 표현에 의해 뚜렷이 드러난다. 이 표현은 사실 이 시의 분위기에 주춧돌을 이루는데, 마지막에는 약간 변주되어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에서 한번 더 나타난다. 조용히 지난 일을 떠올리며 톱밥난로에 톱밥을 던져주는 젊은 남자, 이 장면은 이 시가 이룩한 하나의 서정적 성취의 중심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우리는 붉게 타오르는 불씨를 삶의 핵심적 정력으로, 그 위에 던져져 작고 아름다운 불꽃으로 연소하는 톱밥을 시간 위에 꽃 피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로 바꿔 읽을 수 있게 된다.
 특급열차는 서지 않는 변방의 간이역. 그 역사의 바깥을 채우며 내려 쌓이는 눈. 막차를 기다리는, 삶에 지친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 지펴진 난로. 이와 같은 극적 공간에서 시인은 시적 경구를 생산해 내는데, 그것은 `산다는 것은 때론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과연 조용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게 될 법도 하다. 이 시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응시의 시간을 환기한다. 설사 그 여행이 강요된 것이며 도피의 몫이라 할지라도.
 이 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 곽재구 시인의 등단작이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알뜰하게 사람사는 얘기를 서정적인 필치로 엮어내고 있는 이 시는 1980년대의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정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해설: 이희중]
이승복 2008.01.31 22:47  
2008년 1월 1일부터 조선일보 연재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 100편>에서 이 제목의 詩 보고 여기서 다시 보고 갑니다. 정말 좋은시 다시 감상하고 감사드리고 갑니다.
제목 저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