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며
가을
0
805
2004.08.01 12:18
저자 : 이향아
시집명 : 물새에게
출판(발표)연도 : 1983
출판사 : 문지사
차를 마시며
이향아
차를 마신다
그 한 모금에 눌렸던 열 마디 말이 삭아
이제 얼마동안 나는 할 말이 없다
찻물은 목줄기를 흘러 내리지만
내 이목구비 일곱 개의 창에는
그보다 뜨거운 열기가 남는다
그보다 진한 향기가 남는다
서성거리던 열 손가락
비로소 찻잔을 안아 일으키면
햇넝울같이 출렁이는 작은 구원의 포구엔
아까보다 조금 수척한 내가 비친다
내가 삼킨 희열만큼
병든 안색의 내가 눈뜬다
마셔도 찻잔은 좀처럼 비워지지 않아
마셔버린 그만한 애수가 남아
아, 이제야 돌아와 마주 앉은
찻잔 모서리에 떨리는 입술을 댄다
하루에 수십 잔 커피를 마셔도
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나는 간절하다
나는 진실하다
이향아
차를 마신다
그 한 모금에 눌렸던 열 마디 말이 삭아
이제 얼마동안 나는 할 말이 없다
찻물은 목줄기를 흘러 내리지만
내 이목구비 일곱 개의 창에는
그보다 뜨거운 열기가 남는다
그보다 진한 향기가 남는다
서성거리던 열 손가락
비로소 찻잔을 안아 일으키면
햇넝울같이 출렁이는 작은 구원의 포구엔
아까보다 조금 수척한 내가 비친다
내가 삼킨 희열만큼
병든 안색의 내가 눈뜬다
마셔도 찻잔은 좀처럼 비워지지 않아
마셔버린 그만한 애수가 남아
아, 이제야 돌아와 마주 앉은
찻잔 모서리에 떨리는 입술을 댄다
하루에 수십 잔 커피를 마셔도
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나는 간절하다
나는 진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