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을 갈아입으며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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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4 13:13
저자 : 이향아
시집명 : 어디서 누가 실로폰을 두드리는가
출판(발표)연도 : 1993
출판사 : 도서출판 오상
잠옷을 갈아입으며
이향아
잠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스스로 입는 수의를 생각한다
먼길 떠날 채비를 하듯
머리카락 순히 눕혀 빗질을 하고
비로소 이대로 출발할 수 있을 듯한
설레임
이제는 나를 조여 웅크리거나
부풀려 철없이 풍을 떨거나
고달피 날을 세워
싸우지 않아도 되리
설령 내일 아침 이대로
눈을 뜨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자의 천진함
나는 새벽 이슬처럼 다시
순결해지리
자리를 펴고 누우며 나는
스스로 삽질하는 쾌적한 무덤을
생각한다
긴 강에 띄우는
한 척 종이배의
못 믿을 희열을 나는 누린다
이향아
잠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스스로 입는 수의를 생각한다
먼길 떠날 채비를 하듯
머리카락 순히 눕혀 빗질을 하고
비로소 이대로 출발할 수 있을 듯한
설레임
이제는 나를 조여 웅크리거나
부풀려 철없이 풍을 떨거나
고달피 날을 세워
싸우지 않아도 되리
설령 내일 아침 이대로
눈을 뜨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자의 천진함
나는 새벽 이슬처럼 다시
순결해지리
자리를 펴고 누우며 나는
스스로 삽질하는 쾌적한 무덤을
생각한다
긴 강에 띄우는
한 척 종이배의
못 믿을 희열을 나는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