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나무 그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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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 그늘 아래

가을 0 1748
저자 : 고재종     시집명 :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출판(발표)연도 : 2001     출판사 : 시와시학사
정자나무 그늘 아래

고재종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으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세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날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 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 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는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앞들은 이미 벼꽃 장관을 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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