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1946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남
1964 광주일고 입학. 획일적인 입시 위주 교육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
1969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에 입학. 대학 1학년때부터 3선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섬.
1972 박정희 정권 유신헌법 선포. 이에 전남대 법대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제작
1973 2월, 전국적인 반유신 투쟁을 위해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고발>지 제작. 3월, 이 사건으로 박석무, 이강 등 15명 체포 구속됨.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로 징역2년 집행유예3년 선고 받고, 투옥 8개월만에 석방. 이후 학교 재적
1974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은.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 등 7편의 시로 문단 데뷔
1975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개설, 광주의 사회문화운동 구심점 역할 수행
1977 재차 귀향, 농민들과 함께 <해남농민회>결성. 이는 후일 발족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됨. 그해 말 다시 광주로 나와 광주지역 활동가들과 <민중문화연구소>개설, 초대 회장 역임
1978 <민중문화연구소> 활동의 일환으로 '파리콤뮨' 일어 강독중 중앙정보부 급습으로 피신. 상격 이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가입. 박석률 등과 함께 남민전 '전위대'전사로 활동. 수배중 알제리 해방운동의 기수 프란츠파농의 명저 <자기 땅에서 유배 당한 자들> 번역
1979 10월 4일, 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중 약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 구속됨. 60여일간의 장기구금과 혹독한 고문수사 끝에 투옥됨
1980 5월 2일 남민전 사건 1심 판결, 9월 5일 항소심 판결. 12월 23일 대법원에서 징역 15년 실형 확정. 광주교도소 수감
1984 첫 시집 <진혼가>(청사) 출간
1985 자유문인실천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연구 공동 명의로 석방 촉구 성명서 채택. 4월 27일 '김남주 석방대책위' 발기
1986 전주교도소 이감.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 PEN 대회에서 '김남주 시인 석방 결의문'채택.
1987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9우러17일)에서 석방 촉구 결의문 채택. 일본에서 시집 <농부의 밤> 출간. 일본 PEN 클럽 명예회원으로 추대됨. 제 2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출간
1988 문인 502명 석방 탄원서 제출. PEN 세계본부, 미국 PEN 클럽이 정부에 석방촉구 서한 발송.
1988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남민전'사건 투옥 이후 만 9년 3개월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석방
1989 1월 29일, 광주 '문빈정사'에서 오랜 동지인 약혼자 박광숙과 결혼.
1990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1992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 수상
1993 윤상원 문화상 수상
1994 2월 13일 , 새벽2시 30분 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별세. 전남대 5월 광장에서 ㅗ제 후 광주 5.18묘역에 안장. 2월 19일, 민족예술상 수상.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군이 있음.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진혼가> 청사 1984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시집 <농부의 밤> 일본어판 1987
하이네/브레이트/네루다 혁명시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남풍 1988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시선집 <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옥중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삼천리 1989
시집 <솔직히 말하자> 풀빛 1989
시집 <사상의 거처> 창작과비평사 1991
하이네 정치풍자 번역시집 <아타 트롤> 창작과비평사 1991
산문집 <시와 혁명> 나루 1991
시선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미래사 1991
옥중시선집 < 저 창살에 햇살이 1.2> 창작과비평사 1992
시집 <이 좋은 세상> 한길사 1992
1964 광주일고 입학. 획일적인 입시 위주 교육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
1969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에 입학. 대학 1학년때부터 3선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섬.
1972 박정희 정권 유신헌법 선포. 이에 전남대 법대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제작
1973 2월, 전국적인 반유신 투쟁을 위해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고발>지 제작. 3월, 이 사건으로 박석무, 이강 등 15명 체포 구속됨.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로 징역2년 집행유예3년 선고 받고, 투옥 8개월만에 석방. 이후 학교 재적
1974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은.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 등 7편의 시로 문단 데뷔
1975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개설, 광주의 사회문화운동 구심점 역할 수행
1977 재차 귀향, 농민들과 함께 <해남농민회>결성. 이는 후일 발족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됨. 그해 말 다시 광주로 나와 광주지역 활동가들과 <민중문화연구소>개설, 초대 회장 역임
1978 <민중문화연구소> 활동의 일환으로 '파리콤뮨' 일어 강독중 중앙정보부 급습으로 피신. 상격 이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가입. 박석률 등과 함께 남민전 '전위대'전사로 활동. 수배중 알제리 해방운동의 기수 프란츠파농의 명저 <자기 땅에서 유배 당한 자들> 번역
1979 10월 4일, 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중 약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 구속됨. 60여일간의 장기구금과 혹독한 고문수사 끝에 투옥됨
1980 5월 2일 남민전 사건 1심 판결, 9월 5일 항소심 판결. 12월 23일 대법원에서 징역 15년 실형 확정. 광주교도소 수감
1984 첫 시집 <진혼가>(청사) 출간
1985 자유문인실천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연구 공동 명의로 석방 촉구 성명서 채택. 4월 27일 '김남주 석방대책위' 발기
1986 전주교도소 이감.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 PEN 대회에서 '김남주 시인 석방 결의문'채택.
1987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9우러17일)에서 석방 촉구 결의문 채택. 일본에서 시집 <농부의 밤> 출간. 일본 PEN 클럽 명예회원으로 추대됨. 제 2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출간
1988 문인 502명 석방 탄원서 제출. PEN 세계본부, 미국 PEN 클럽이 정부에 석방촉구 서한 발송.
1988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남민전'사건 투옥 이후 만 9년 3개월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석방
1989 1월 29일, 광주 '문빈정사'에서 오랜 동지인 약혼자 박광숙과 결혼.
1990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1992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 수상
1993 윤상원 문화상 수상
1994 2월 13일 , 새벽2시 30분 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별세. 전남대 5월 광장에서 ㅗ제 후 광주 5.18묘역에 안장. 2월 19일, 민족예술상 수상.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군이 있음.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진혼가> 청사 1984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시집 <농부의 밤> 일본어판 1987
하이네/브레이트/네루다 혁명시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남풍 1988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시선집 <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옥중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삼천리 1989
시집 <솔직히 말하자> 풀빛 1989
시집 <사상의 거처> 창작과비평사 1991
하이네 정치풍자 번역시집 <아타 트롤> 창작과비평사 1991
산문집 <시와 혁명> 나루 1991
시선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미래사 1991
옥중시선집 < 저 창살에 햇살이 1.2> 창작과비평사 1992
시집 <이 좋은 세상> 한길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