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寂) -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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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寂) - 정일근

유용선 1 2479
적(寂)

                        정일근

작은 등불을 밝히고 일주문 밖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거는 젊은 여승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녁부터 시작한 산사의 눈 공양은 새벽이 와도 그치지 않고
고요한 절 마당 위로 더욱 적요한 눈만 덮여 법도 말씀도
동백나무들의 뿌리마저 추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몰래 마음 문 열고 나와, 끊어진 세상의 길에 줄 이으며
파르스름하게 떨리는 목덜미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 누가 볼까, 눈발은 소리 없이 굵어졌지만
문 안에서 따라나온 긴 발자국들도 이내 숨어버렸지만
1 Comments
유용선 2004.01.15 00:30  
깊은 산 속에 절(寺), 절 위에 공양처럼 쌓이는 눈(雪), 밤새 내린 눈 때문에 더욱 세상과 멀리 끊겨 있을 것만 같은 여승(女僧)의 마음. 그 마음이 무시로 닿을 삶(生), 그 삶을 어디론가 잇고 있는 굵고 기다란 전화선. 눈길(雪路)을 따라 울리는 수줍은 대화. 비밀스러운 고요(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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