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것들과 함께 [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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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것들과 함께 [이기철]

들꽃세상 0 3086
추운 것들과 함께


- 이 기 철 -



지고 가기엔 벅찬 것이 삶일지라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천인절벽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는 망아지처럼

건너온 세월, 그 물살들 헤어본다 한들

누가 제 버린 발자국, 쓰린 수저의 날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는가

독충이 빨아먹어도 아직 수액은 남아 나무는 푸르다

누구의 생이든 생은 그런 것이다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오란 새의 부리를 검게 만드는 일뿐

상처가 없으면 언제 삶이 화끈거리리

지나와 보면 우리가 그토록 힐난하던 시대도

수레바퀴 같은 사회도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계절을 이긴 나무들에게

너도 아프냐고 물으면

지는 잎이 파문으로 대답한다

너무 오래 내려다보아 등이 굽은 저녁이

지붕 위에 내려와 있다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

세상의 온돌들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들도

오늘 늦가을 지붕을 인다




* 해설 : 정효구
궁극적으로 삶은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이기철 시인의
생각이다. 그에게 삶이란 '지고 가기엔 벅찬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하여, 도중에 '내려놓을 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뿐 아니다. 삶이란 '우리가 그토록 힐난하던 시대도/수레바퀴
같은 사회도 마침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있다. 그에겐 삶이란 '언젠가는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들도' , 오늘, '늦가을 지붕'을 새로 고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추운 것들과 함께' , '세상의 온돌들'을 데우며, 힘겹지만 앞으로
발걸음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이기철 시인이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이다.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2002 좋은 시(현대문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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