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업(詩業) / 박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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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업(詩業) / 박얼서

박얼서 2 1723
시업(詩業) / 박얼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는 ‘시를 짓는 일이야말로 우리 가문의 일이다(詩是吾家事)’ 라면서 시 쓰기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가업이라고 말한다. 시업(詩業)이 마치 가문의 상징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큰 자부심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시(詩)란 대체 내게 어떤 존재인가?’라며 나름대로 틈틈이 자문해 보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두보처럼 가업으로 이을 만큼의 뛰어난 능문(能文)도 못 되고, 거기에 어떤 절박함이나 목적의식이 뚜렷했던 것도 아니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저 꾸준했을 뿐이다. 새벽을 통해 시업을 근근이 이어 왔을 뿐이다.

이를 꼭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시란 나에게 새벽이다(詩是吾平旦)’ 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벽은 나를 번쩍 일으켜 세웠고, 수렁에 빠진 채 오랫동안 허우적대던 내 시업(詩業)의 불씨를 되살려 준 인연도 바로 이 새벽이었다. 새벽은 그렇게 몽매한 나를 조건 없이 받아 줬고, 나는 새벽의 품에 덥석 안길 수 있었다.

새벽은 나에게 시작(詩作)의 산실이었으며, 매일매일 새로운 의욕으로 채워 주었고, 그렇게 채워진 충만한 하루를 선점하고 이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창작방 같은 것이었기에, 내게 있어 1시간의 새벽은 다른 10시간을 능가하는, 아니 그 이상의 하루를 대신할 만큼 신비의 마법이 작용했다.

새벽은 늘 차분하면서도 활기차다. 새벽은 개화를 앞둔 꽃망울처럼 두근두근 여명을 앞세워 소리 없이 접근한다. 은은한 향취로, 청아한 이슬방울로 정신을 맑히며 접근한다. 물안개처럼, 명상처럼, 부지런한 새들의 가벼운 날갯짓처럼, 건강한 맥박으로, 짙푸른 침묵으로, 새벽은 늘 그렇게 다가선다.

새벽은 침잠의 공간이다. 세상을 이끄는 선견지명이다. 새벽은 하루를 여는 두뇌로서 생각이 머무는 곳마다 깊은 철학들이 숨 쉬는 교실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새벽을 배운다. 하지만 새벽의 판단력은 냉철하다. 나처럼 적극 찾아드는 사람만을 맞아 반긴다는 점이다. 때 묻지 않은 시간의 미립자로서 늘 신비한 뭔가를 내준다는 점이다.

나는 첫새벽을 맞을 때마다 이는 하늘이 내린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행복감에 항상 머리 숙여 감사하는 편이다. 그런 새벽이 내 시업(詩業)의 원류가 된 지도 꽤 오래전이다. 새벽이야말로 밤새껏 휴면에 들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해맑은 시상(詩想)들로 꿈틀거리는 영혼의 자궁이기도 하다. 시작(詩作)의 용광로인 셈이다.

시인, 누군가에겐 참 낭만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날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단 한 줄을 이뤄 내지 못했을 때, 그나마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던져질 때의 자괴감이란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패배감일 테다. 한때는 시업이야말로 내 전생의 죄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놓고 밤새껏 고민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해 보니 그건 차라리 특권일 수도 있겠다 싶어 지금은 자부심으로 키우는 편이다.

무에서 유를 찾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일 텐가! 그만한 고통도 없이 어찌 감히 시를 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 줄의 시를 놓고 밤새껏 씨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 그런 의욕들이야말로 나에겐 분명 행운이면서 창의력인 셈이다. 천착하면 할수록, 치열하면 할수록, 그 긴장감은 점점 더 팽팽해져 기상천외하지 않겠는가.

갑작스레 ‘한 줄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일화가 생각난다. 거액을 기부하게 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까짓 1,000억 원쯤이야, 그 사람(白石)이 쓴 ‘한 줄의 시’만도 못한걸.”이라는 대답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백석의 영원한 연인 자야였다.

자야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 백석과 그의 시들을 사랑했다. 자신의 한평생을 백석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으로 살았던 자야가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불교의 한 재단에 기부하면서 남겼던 말이다. ‘한 줄의 시만도 못한 걸’ 이런 단 한 줄의 시구(詩句)에 목숨 거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시업(詩業)을 이끄는 시인들이다.
2 Comments
상곡 2021.10.17 06:47  
동감합니다. 주머니속에 돈이 없어도 쌓아놓은 컴퓨터 속에 쌓여 있는 시 화일 리스트를 보며 빙그레 웃는 것이 시인인 것을... 선생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얼서 2021.12.29 07:17  
감사 감사합니다, 더 큰 건강과 건필을 응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