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 김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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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 김영승

가을 0 2619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김영승



내가 무슨 로마의 교황이라고, 나도 한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 도착하면 도착하자마자 엎드려 그 길에 입을 맞추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벌써 20년도 훨씬 넘은 총각(?) 시절의 얘기다. “그 곱고 순수한 마음을 제가 압니다…”하고 고백하며 그런 길을 걷다보니 나는 분명 잃었던 건강을 참 많이 회복한 것 같다.

사랑은 언제나 무조건, 무전제, 무기한이어야 한다고 무슨 정언명법처럼 끝없는 자기암시를 주고 살아왔었는데, 세상의 사랑은 대개가 변덕이 죽 끓듯 하여 조석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기조차 하는 것이다. 가령 병이 깊다고 생각되는 어떤 한 사람을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간호하여 그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하는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당신의 병이 나았으니 저의 간호사 역할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운운하며 떠나는 사랑을 생각하면 농락당한 느낌이 든다. 그 일방적이고 무책임한 역할을 다 즐기(?)고, 그는 또 누군가한테 가서 또 다른 어떤 한 역할을 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과연 무슨 ‘역할’인가.

사랑을 한답시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남녀들이 맡은(?) 피차의 역할도 참 많다. 상담자 역할, 심심풀이 땅콩 역할, 말동무 역할, 애완동물 역할, 보호자 역할, 후견인 역할, 물주(物主) 역할… 등등등.

그 간호를 받아들인 것도 사랑이다. 그리고 병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자기가 뭔데 왜 그런 간호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단 말인가. 20대 시절 내가 나눴던 그 무수(?)한 엉망진창의 지리멸렬한 사랑이라는 것이 다 그 모양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연인들이여 떠날 사람은 빨리빨리 떠나게 하라, 무슨 선지자처럼 괜히 그렇게 외쳐보게도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두개골 속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같은 침대를 하나씩 갖고 있어 길면 긴 만큼 잘라서 죽이고 짧으면 짧은 만큼 늘려서 죽이는, 결국 죽이고야마는 지극히 자기중심적 사랑을 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사랑은 그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며, 그래서 또한 영원하다. 부모도 자식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들이지만 심심하면 곧 떠날 것이라고 말하며 사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만날 수 있든 만날 수 없든, 죽었든 살았든… 사랑은 무슨 ‘역할’이 아니라 그저 ‘있음’이다.

길은 나의 병을 낫게 했는데도 떠나지 않는다. 황사 강풍이 부는 이 밤, 나는 엎드려 그 길에 친구(親口)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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