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외로움의 상처 - 김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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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외로움의 상처 - 김영승

가을 0 2586
외로움의 상처  

김영승



누구나 무작정 걷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도 무작정 걷고 싶을 때가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므로 나는 또 그렇게 무작정 걷는다. 완전히 붕괴되었던 육체와 영혼을 일부나마 복구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렇게 무작정 걷는 일은 어느새 내 삶의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이 된지 오래다. 역시 심야의 산책길, 노래를 부르며 걷기를 좋아하는 내가 또 말이 없어졌다. 마치 밥맛이 똑 떨어지게 만드는 어떤 꼴을 당한 것처럼,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듯 나는 괜히 부르던 노래를 뚝 그쳐버린 것이다. 괜히 나도 참 어지간히 외로운 인간이구나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그렇게 외로운가.

외롭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엄습해온다. ‘아무도 없다고 하여라/빈집이라고 하여라//5억년 뒤에 돌아올 것이다.’ 그건 일본의 시인 다카하치 신기치가 노래(?)한 실존적인 고독, 문득 사위가 그저 칠흑의 광야 같다. 수십억의 인구가 사는 이 세상을, 아니 이 지구 위를 그는 왜 아무도 없는 빈집이라고 했을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는 또 괜히 기형도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 ‘빈집’을 애써 떠올려본다. 강남의 시네하우스에서 시인들을 위한, 밀란 쿤데라 원작의 영화 ‘프라하의 봄’무료 시사회가 있었을 때의 일이다. 여성의 음모가 그대로 노출되는 그 무삭제 영화를 일반에게 개봉하기 전에 원래 필름 그대로 먼저 보고 온 소감을 놓고 낄낄거리다가 우연히, 영화만 보고 금방 그 자리를 뜬 기형도의 그 ‘빈집’ 얘기가 나왔었다. “아니 이 친구 곧 죽을 것 같아….” 술을 마시면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었고, 그리고 그는 그 몇 개월 후에 죽었다. 그의 ‘빈집’은 ‘무덤’인가. 그리고 나는, 아니 우리는 사랑을 잃었는가.

24시간 불가마 찜질방 그 휘황한 붉은 네온이 어쩐지 다정해 보였다. 그리고 보도 블록 사이, 가로등 불빛 아래 보이는 그 푸른 것은 분명 냉이였다. 나는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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