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움으로 아름다움을 되찾자 / 박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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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움으로 아름다움을 되찾자 / 박얼서

박얼서 0 1060
신비로움으로 아름다움을 되찾자 / 박얼서


한때는 우러러뵈던 것들이 있었다. 사시(司試) 혹은 행시(行試)를 패스했다느니, 개천에서 용이 났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었다. 누구든 한 번쯤 도전하고픈 꿈이었을 터이다. 하루아침에 판사 혹은 검사 또는 사무관으로 임용되는 벼락출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실 고시 합격이란 신언서판을 능가하는 신분상 보증서 같은 거였다.​

그런데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고시(高試)를 패스했다고 해도, 대학교수, 의사, 건축사, 변호사, 회계사라는 고급 직함을 내밀어도, 그저 다양한 전문직종 중에 어느 한쪽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어떤 신분적 위상이나 권위는 느낄 수 없다. 사회적 인식과 기능들이 진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리잡은 선진적 의미로 해석된다.​

우린 지금 GDP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부상했다. 거기 더해 지구촌이 부러워할 만한 문화 강국으로서 세계 무대를 누비며 꾸준히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저기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나날이 불어나는 외형적 몸집에 비해 뭔지 모를 불확실성에 대한 허전함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심리적 불안 때문이다. 신비감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동안의 여러 희망과 의욕들도 신비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신비감이야말로 희망을 싹 틔울 미래 가치의 씨앗이라는 생각이다. 인생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신비로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잠시 벤젤피터(Wenzel Peter)의 작품 '에덴동산' 속으로 발길을 옮긴다. 아담과 이브가 원시 자연과 함께 하나의 가족을 이룬 동산이로다. 평화로움을 아름다움을 잘 묘사한 그림이로다. 사자와 토끼, 독수리와 닭이 함께 어울리고, 경쟁과 다툼이 없이도 의식주 걱정 없는 무위자연의 세상, 자연과 낙원 그대로였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사람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인류 스스로 신비로움을 깨고 말았기 때문이다. 낙원의 평화를 함께 나누려는 노력보다는 그걸 소유하려는 욕망이 더 큰 탐욕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탐욕은 숙명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바라봐야 할 지향점은 언제나 선(善)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선을 이탈한 욕망은 위선으로서 거악으로 발전할 뿐이다. 탐욕인 셈이다. 그런 탐욕의 위험성 앞에, 옳고 그름의 가치 그 경계선마저 모호해져 가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오늘날 자연 생태가 신음하고, 악성 바이러스가 출몰하고, 서로에게 불신이 깊어가고, 가정이 붕괴되고, 인간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인구는 줄고 있으나 갈등은 점점 더 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몹시 아파하는 모습이다. 뒤뚱거리는 모습이다. 뭔가 처방이 절실한 시점이다.​

마음이 없으면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를 열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먹으면서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다. 마음과 마음을 활짝 열어둘 일이다. 마음과 마음으로 세상을 귀담아들을 일이다. 우리 서로 공감을 회복할 때다. 초심을 회복할 때다.

젖먹이 시절, 엄마로부터 체온을 익히고, 모성을 익히고, 사랑을 배웠던 선한 잠재력을 깨워야 할 때다.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면 결국엔 잊고 마는 법이다. 우리 모두 선한 잠재력을 되찾을 일이다. 아름다움을 신비로움을 되찾을 일이다. 우리들 인류가 추구하는 행복의 첫걸음도 선량함에서 출발한 셈이다. 선함이 그 가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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