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시작 메모 /진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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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의 시작 메모 /진이정

유용선 0 2401
어느날의 시작 메모

                            진이정 (문학정신 1991년 10월호)

 한 편의 메모가 하나의 시로 화할 때 난 노다지를 캔 기분에 젖어든다. 허나 그 행복감은 온세상 불행의 도가니에서 힘겹게 길어올린 것들이기에 불안정할 뿐 아니라 그 맛도 떨떠름한 것이다.
 어쨌든 좋은 메모는 시를 낳는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무언가를 쉴 새 없이 메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애써 적어두었던 메모들 중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폐기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난지도인 묵은 수첩 더미에 파묻힌 채 썩어 없어질 날만을 기다린다. 어쩌면 나는 시로 환생한 메모보다는 저 난지도에서 소멸을 기다리는 그들에 더 애착이 큰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난지도를 일거에 태워버릴 수 없다. 다만 풍화되기를 기다릴 뿐이며, 그것이 내가 나의 메모에게 표하는 유일한 경의인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명상을 하다말고 전화벨 소리에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 장면을 나의 메모는 크로키한다. 아니 해놓았다. 또한 어느날 나는 무작정 문밖을 나선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를 그냥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이다. 역시 나의 메모는 그것도 빠르게 크로키해 놓았다. 그런 순간, 나는 그것들이 시가 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오직 메모할 뿐이다.
 감히 메모광이라 자처할 순 없다 하더라도, 나는 제법 근면하게 메모하는 사람의 부류에 속한다. 그렇다 나는 단지 '메모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메모 속에서 웃고 울고 고민하고 마침내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의 저 아뢰야식조차도 단지 한 덩어리 메모의 난지도에 불과한 것이 아닐가 하는 심각한 망상에 도달하게 된다.
 각설, 나는 메모한다. 고로 메모할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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