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짧은 수필이 아니다 - 미닛세이(minissay) 장르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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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짧은 수필이 아니다 - 미닛세이(minissay) 장르의 필요

유용선 0 3304
미닛세이(minissay) 장르의 필요

                                    유용선
 

  시라고 보기엔 이미지나 사유의 함축 및 운율이 부족하고 아포리즘은 아니면서 수필의 요소를 모두 갖춘 글들이 십수 년 전부터 우리 문단에 시의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 특유의 포용성 때문에 시로 발표되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 시가 아닌 시적인 산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사사로이 미닛세이(minissay)라 불러 보려 한다. minessay라 적고 '미넷세이'라 발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마이너세이'로 읽힐 가능성이 높아 minissay라 적고 '미닛세이'라 부르기로 한다. 콩트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픽션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미니픽션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렇다면 짧고 시적인 에세이를 미닛세이라 불러 독립시키지 못할 까닭도 없겠다.

  미닛세이는 산문에 시정을 갈무리해 넣은 에세이이거나 시를 건축하기에 앞서 그리는 에스키스(밑그림)이다. 오해하지 말라. 그런 글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시라고 해서 시 아닌 글보다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니며, 시가 아니라고 해서 그 담고 있는 정신이 시보다 못하란 법도 없다. 어느 시 못지않게 깊이 있는 사유와 아름다운 문체로 빚어진 산문은 얼마든지 있다. 요는 외형이 아니라 본질 즉 정신이다. 자신에게 잘 맞는 형상을 미처 찾아내지 못한 질료는 임시로 큰 그릇에 담아두는 것이 옳다. 무리하게 기성의 형식 가운데 하나를 찾아 거기에 끼워 넣으려 하면 탈이 나기 쉽기 때문이다. 에세이의 유연성이야말로 이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또한 설령 시를 염두에 두며 썼다가 끝내 시가 되지 못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그 자체로 한 장르를 이룰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시란 즉흥으로 나올 수도 있고, 하룻밤을 꼬박 새운 끝에 완성될 수도 있으며, 몇 년을 걸쳐 건축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을 성급하게 시로 발표하려 들지 않고 먼저 짧은 에세이로 시정과 중심이미지를 단단히 구축해 놓는 것은 매우 좋은 습관이라 하겠다.

  시로서 발표된 글들을 구별하여 새롭게 명명하려는 나의 시도는 비록 사사로운 것이긴 하지만 어쩌면 시인들의 불만을 살 수도 있겠다. 93년 이후 그 동안의 문단 경험을 통해 내가 본 바로, 우리나라에는 '문학의 장르 가운데 최고 우위에 있는 것은 시이다'라는 믿음을 고집하는 시인들이 꽤 많다. 그들은 그러한 믿음을 '시가 가장 우위에 있으므로 시인이 문인 가운데 가장 우위에 있다'는 논리로 발전시켜 '시인이 최고'라는 시대착오의 자가당착에 빠져든다. 그리고 시인이란 칭호를 병적으로 탐한다. 그러나 시인이 최고라는 논리는 <시인은 소설이나 수필이나 희곡 가운데 적어도 두 가지는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는 문필가>라는 조건이 성립될 때에 한하여서만 참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문단의 현실은 어떤가? 어쩌면 이미 오늘날 일반인의 눈에 비친 시인이란 '알듯말듯한 글을 즐겨 쓰는 괴팍스런 글쟁이' 혹은 '짧은 수필을 전문으로 쓰는 문인'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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