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꽃 / 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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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꽃 / 홍영수

홍영수 0 1499
해설
 
 궁극의 완성, 그 연결고리들
                                 
                      문정영(시인)                                       

  날마다 우리는 한 쪽으로만 깎이는 절름발이 균형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홍영수 시인의 시집 󰡔흔적의 꽃󰡕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다. “너는 누구냐? 아무것도 아니지!”가 폴 발레리의 자문자답이라면, ‘궁극의 완성은 무어냐?’ ‘아무것도 없음이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음이란 얼마나 많은 비움의 철학을 익혀야 알게 되는 것일까. 홍영수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으로 말한다.
  또한 시인은 익숙함에서 익숙하지 않는 것, 당연한 사물이 당연하지 않는 순간에, 대상과 대상들의 심장을 순환하는 모든 피의 기원이 팔딱거린다고 말한다.
 
  때로는 리듬을 경계하며, 기원을 파헤치는 연결고리들을 물색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일상의 경험에서 체득한 생의 강도를 독자와 연결하는 무수한 통로를 만들고 있다. 시인의 시視처럼 “물음표를 찾다/ 물음표조차 묻게 하는 뒤틀린/ 視.”이듯이 홍영수 시인에게 시쓰기는 외부와 내부의 낯선 존재들을 읽어내고 그럼에도 함께 공존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시쓰기는 지난한 삶을 어떻게 지내며 살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며 그의 시편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의 과정을 독자에게 보여주는데 있다. 
 
햇살에 걸린 은빛 파도로
돌무늬에 시간의 눈금을 새기면서
얼마나 구도의 길을 걸었기에
손금 지워진 어부처럼
지문마저 지워져 반질거릴까.
 
낮게 임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깻돌, 콩돌, 몽돌이 되어
알몸 맨살 버무리며
철썩이는 파도의 물무늬로 미끈거릴까.
 
평생 누워 참선하면서
바다 소리 공양에 귀 기울이며
얼마나 잘 익은 득음을 했기에
 
수평선 너머 태풍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무한 고통의 탯줄을 끊은
저 작은 생명력, 그 앞에선
파도마저 차마 소리 죽여 왔다 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잘 마모되어 간다는 것.
얼마나 더 마모되어야
내 안에 몽돌 하나 키울 수 있을까.
       
                -「몽돌」전문
 
  파도가 무한에서 나오는 본래의 면목이라면 아무것도 없음 역시 죽음보다 삶에 존재할 것이다. 파도가 하루에 70만 번씩 철썩이는 운명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운명을 바다가. 수평선이, 하늘이, 그 어떤 존재들이 억지로 가만히 침잠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도가 철썩이는 운명을 거절할 수 없다고 하자. 거기에서 홍영수 시인은 파도로부터 수동과 피동을 벗어난 경계, 최선에서 최대로 살고 있는 “잘 마모되어” 가는 몽돌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저 작은 생명력, 그 앞에선/ 파도마저 차마 소리 죽여 왔다 간다.” 라고 말한다.
  시인은 “평생 누워 참선”하는 몽돌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몽돌의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누워도 누운 것이 아니고, 성이 나도 성이 난 것이 아닌 몽돌은 오래 참선 중이다.
 
  “내 안에 몽돌 하나 키울 수 있을까”라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끝내 내 안에서 몽돌조차 없애는 완성의 경지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몽돌과 바다, 몽돌과 파도로부터의 풍성과 비워짐의 궁극인 경지, 우리의 목을 조르는 온갖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시인은.
  그러나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읽어내야만 이 시의 참맛을 알 것이다. 이 거친 사회의 비바람을 다 거친 후에야 내 안에 몽돌 하나를 키울 수 있다는 자성의 깨달음을 홍영수 시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
 
  “먼지 낀 내 발자취의 마루를/ 빗자루로 쓸어내면/ 티 없이 맑은 내가 될 수 있을까.”(「작은 연못」)에서 보여주듯 마음의 먼지를 쓸어내는 행위를 통하여 시인 자신을 한없이 낮은 자세로 보여주고 있다.
  아래 「몽땅 빗자루」에서 그 의미는 좀 더 폭을 넓혀 펼쳐지고 있다.
 
 
깔끔한 툇마루 끝에
쓸어 담다 닳고 닳아 시린 아픔 하나 있다.
녹슨 못에 걸려 있는 때 묻은 손잡이엔
부엌 문지방 넘나들던 엄마의
지문 자국이 흐릿하다.
 
비바람 알갱이로 슬어 놓은 먼지와
자신의 온몸 닳아가며 남긴 티끌은
절반을 먼저 보내고 남은
반 토막의 경전.
 
뒷바라지를 치마로 두르고
엄마를 저고리로 껴입은 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다
지팡이 손잡이처럼
절반으로 굽어 버린 기역자의 법열 등.
 
서로 다독이며
좀먹은 마루판 사이를
헐벗고 닳아가면서 비질하고 있다.
누군가 밟고 디뎌야 할
마룻바닥의 티를
 
티 나지 않게 쓸고 있다.
 
                              -「몽땅 빗자루」전문
 
  아픔은 아픔인 것이다. 몽땅 빗자루는 때로 뜨거운 불판 위였을 것이고, 또 때로는 한 차례의 물뿌리기가 지나간 자리였을 것이고, 또 때로는 시인의 영혼을 위협하는 봉인된 몇 겹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쓴다. 쓸린다. “쓸어 담다 닳고 닳아 시린 아픔 하나 있다.”에서 보여주듯 타자에 대한 배려의 눈도 깊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음을 시인은 진즉 깨닫고 배운 것이다.
 
  다 놓아버려야만 드러나는 법이랬다. 수행의 요체는 무위, 무주, 무념이랬다. 일찍이 육조 혜능스님은 본래면목에는 쓸고 닦을 먼지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때때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잘못한 일도 없이 내동댕이쳐져서 흐느껴 운다. 몽땅 빗자루.
 
  시인은「몽땅 빗자루 의 삶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기실 그 아픔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어머니의 근원적인 서사를 말한다. 아니 그 너머 “자신의 온몸 닳아가며 남긴 티끌은/ 절반을 먼저 보내고 남은/ 반 토막의 경전.”을 말한다. 어쩌면 어머니의 희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얼마를 더 가야
숨 한 번 고를 수 있을까.
목에 힘을 빼고
뱃심으로 밀어 올려
서서히 몰아쉬는
감는 목과
갑자기 떨어뜨린
꺾인 목에서
곰삭은 시김새가
그늘 있는 소리를 만들면서
게미를 더해 갈 때
점점 짧아져 가는 호흡
멈출 수 없어
눈치 채지 못하게
티 안 내고
동글동글 굴려가며
공 튀기듯
탁탁 튕기면서
은근슬쩍 넘기고
들숨 날숨의
틈새에서
새치기하듯
사알짝 들이마시는
몰래하는 숨.
 
                      -「도둑숨」전문
 
 
  가부좌를 하고 몇 시간이고 면벽한 시인이다. 벽면을 따라 자신의 감옥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그러다 혼침에라도 빠지면 등을 치는 죽비에 화들짝 깬다. 초집중이 되어 있을 때에는 새의 깃털을 코 밑에 대어도 깃털이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도둑숨이란 아주 미세한 호흡이다.
 
  “들숨 날숨의/ 틈새에서/ 새치기하듯/ 사알짝 들이마시는/ 몰래하는 숨” 하, 도둑숨이라니. 그 무엇이 미친 채 뿌리가 뽑힌 채 달려드는 힘, 백일몽, 아뿔싸! 소문, 조심 또 조심할 것들, 내리꽂힌 동백, 한 얼굴의 다중, 통제할 수 없는 시력, 자생력 없는 상상력이 사분의 삼쯤 침몰한다. 이때쯤 도둑숨을 아니 쉴 수 없을 게다. 보아라 보이는가. 들어라 들리는가. 느껴라 느껴지는가. 그럼에도 아니 보이고 아니 들리고 아니 느껴질 이때쯤 도둑숨을 아니 쉴 수 없을 게다.
 
  끝까지 화두를 놓치지 않는 오롯한 홍영수 시인에게서 도둑숨의 호흡이 절제의 미학으로 통하는 순간이다. 시인의 들숨 날숨의 틈새에 들어온 ‘도둑숨’을 훔치는 우리 또한 도둑, 독자라는 도둑일 것이다.
 
먼 곳에서 아니,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영감은 발등에 얹혀 찾아오고
생각은 시심을 안고 문을 두드린다.
누군가 있다, 내 안에
붙박이의 등걸, 토박이의 텃세
응고된 틀, 그래서 깰 수 없는
그 안에 섬, 고립된.
나 혹은 너, 아님 그,
이름할 수 없는 것들의 거부로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서성거리는 밖이 두드릴 때
멈칫거리는 안은 잠그려 하고
밀고 당기다 삐꺼덕거리며 생긴 문틈
틈새 사이로 비친 한 줌 햇살이
꽉 닫힌 문 속의
곰팡 핀 사고와
녹슨 은유를 증발시킨다.
내 안의 내가 빠져나가고
또 다른 내가 들어와
다양한 내가 되어간다.
 
                          -「나를 버리다」전문
 
 
  얼마나 나를 버려야 버려지는 내가 있을까? 시인은 무엇으로 갇히는 것일까?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와 남의 분별이 없는 것, 그래야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열려고 하지만 “나 혹은 너, 아님 그,/ 이름할 수 없는 것들의 거부로/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서성거리는 밖이 두드릴 때/ 멈칫거리는 안은 잠그려 하고” 정녕 자유로워질 수 없는 안팎의 경계, 그것은 자신에게로 깨어 있는 시심일 것이다.
 
  홍영수 시인은 영감이 “발등에 얹혀 찾아”온다고 한다. 깊고도 넓은 영감의 원천, 어서 와라. 그리하여 머물러서 “내 안의 내가 빠져나가고/ 또 다른 내가 들어와/ 다양한 내가 되어간다.”는 시인의 섬을 우리는 오래 마주하고 싶다. 무경계에서.
 
  지금까지 홍영수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를 들여다보고 공감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시인이 밖으로 내미는 시선에 걸려 있는 것들을 말하고 싶다. 안에서 일어난 깨달음은 결국 밖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위질에 잘린 자투리들
내동댕이쳐진
조각조각의 슬픔을 안고
색색의 복福을 지으며
한세상을 이룬다.
 
버려진 것은 버려진 대로
상처는 상처끼리
보듬어 다듬고
잇대어 이웃하며
어울림 한 자락 펼친다.
 
한 면 한 면
천賤한 천들이
꼭 부둥켜안으니
다름이 하나가 되는
대동의 미학을 이룬다.
 
버려야 할,
나의 삶 몇 조각
한 쪼가리 쓰임이 되고 싶다.
 
                        -「조각보」전문
 
 
  여러 조각의 헝겊을 대어서 만든 보자기를 조각보라고 한다. 그 조각보를 시인은 “조각조각의 슬픔을 안고/ 색색의 복福을 지으며/ 한세상을 이룬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가. 결국 우리는 “상처는 상처끼리/ 보듬어 다듬고/ 잇대어 이웃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시인은 “나의 삶 몇 조각/ 한 쪼가리 쓰임이 되고 싶다.”라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담하게 쓰고 있다.
 
  이런 시인의 사회에 대한 시선은 약자에게 가 닿거나 긍휼한 마음에 전해지기도 한다. 시가 시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도구라고 하여도 그 시선은 결국 밖을 향해 있다고 말하였듯, 진정성 있는 시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깊고 따뜻한 눈길에 있을 것이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기계적으로 칼질할 때/ 할머니 속마음 같은 하얀 더덕에서/ 삶의 진액인 듯/ 배어 나온 끈적끈적한 액/ 오가는 발걸음에 진한 향으로 얹힌다.”(「환승역 할머니」)에서는 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에서 삶의 진한 향기를 끌어내었으며, “새벽에 출근과 동시에 입사하고/ 오후에 퇴근과 동시에 퇴사하는/ 하루살이의 하루살이/ 헐렁한 가방 속에는/ 어둑새벽에 딸려 온/ 가족이 담겨 있다.”(「하루의 직장」)의 일용근로자의 아픔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선은 사회의 후미진 구석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또한 시인의 시선에는 가족의 우애와 정이 따뜻하게 담겨 있다. “찬바람에 실려/ 핑크빛 모자를 얌전히 눌러 쓰고/ 행여 잠든 자식 깰까 봐/ 방문 열고 더듬거리며 이부자리를 살”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흰 추위 속/ 알바생 딸의/ 무거운 발소리/ 잠 못 든 애비가/ 눈으로 듣고/ 귀 고막으로 슬피” 떠는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 이르기까지 가족 사랑을 오롯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홍영수 시인의 아래 시 한 편으로 그가 시인으로 생활인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낮추고 엎드린 모습 위로
지문처럼 찍힌 발자국들이 선명하다.
딱딱하고 거친 길 위에
무엇과 맞서려고
땅에 납작 엎드려
붙을 듯 말 듯
앉은뱅이 모양으로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
비록 잎사귀는 볼품없지만
유연함은 트럭의 바퀴에도 잘리지 않고
질김은 탱크 무게에도 꺾이지 않으며
갈라질지언정
끊어지지 않는 차전자車前子
자신의 영토를
굳건히 지키는 질경이
얼마나 피 끓는 분노를 품었기에
심장의 꽃으로 피어날까.
 
                          -「혁명가」전문
 
  질경이는 밟아도 상처를 입을지언정 죽지 않는다. 질기고 질겨서 질경이! 끈 떨어진 연처럼 어느 지붕이나 나뭇가지에 걸려 너덜너덜한 것이 절대 아니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고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변하지 않는 혁명가 질경이의 근성은,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우리나라 국민성과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폭력 없는 질경이, 대한민국을 다시 일깨우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평화로운 혁명을 이루었다. 자신 속에서, 우리 속에서 나라 속에서, 세계 속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꽃을 피웠다. 

  홍영수 시인은 이번 시집에 시인 자신의 자성과 주변에 대한 폭 있는 관심을 행간에 넣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시편들의 분위기는 시인이 살아온 내력을 온전하게 보여 주었다. 한 권의 시집으로 시인의 삶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부족하지만 시인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생활하였는지 일견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이 시집을 통하여 시인의 진정성을 받아 안을 수 있다면 충분히 홍영수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세계를 읽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심장의 피를 검사해보자. 그럼 분명 질경이의 DNA를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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