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추억] 가난과 슬픔과 사랑을 남기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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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추억] 가난과 슬픔과 사랑을 남기셨네

가을 0 2301
(36) 시인 정일근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봄밤이었다. 누군가 깊은 잠을 깨워 짜증스럽게 눈을 떴는데 이종누이가 울면서 나를 깨우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이종누이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편안하게 잠들어 계셨다. 가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곤 하셨는데 군의관인 아버지 친구 분이 사망선고를 내렸다. 아버지 일어나세요. 아버지 일어나세요. 울면서 아버지를 깨웠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마산에 다녀오는 길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베푼 마지막 사랑은 출발 전 자신의 헬멧을 어머니에게 씌워주신 것이다. 그 사랑으로 두 사람은 생과 사가 갈라졌다.


정성모(鄭成模). 1936~1970. 아버지의 생몰연대는 그렇게 길 위에서 끝났다. 만 34살의, 가족 일곱 명이 딸린 가장은 무책임하게 레테의 강을 건너가 버렸다. 남은 가족―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고모 둘, 어머니, 나, 여동생은 파산선고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집도 아버지의 빚잔치에 넘어가 버렸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젊음을 몽땅 저당잡혀야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를 증오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낮에는 철길 가에서 시멘트 빈 봉투를 털고 밤이면 종이봉투를 만들어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고모들의 학비를 마련했다. 어머니는 작은 식당에서 밥장사 술장사로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으며 어린 우리 두 남매를 키우셨다. 나도 학교를 마치면 식당 일을 도와야 했고 어린 동생은 방이 없어 부뚜막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감당할 수 없는 가난과 슬픔 때문에 나는 눈물 많은 소년이 되고 말았다.


시인이 되고 나서도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많은 가족들이 아버지를 꿈속에서 만났는데 내 꿈속으론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일도 미웠다. 아버지는 내 시 속의 금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에서 살다 가신 나이보다 많아지고부터 나는 아버지와 화해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버지가 나에게 미안해서 꿈길로도 찾아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 아버지. 불쌍한 내 아버지. 그때부터 아버지는 내 시 속으로 걸어오시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달걀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내 달걀 속에서 아버지가 태어난다’(졸시 ‘따뜻한 달걀’ 끝 구절)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이 끝이었다. 우연히 아버지가 다닌 중학교에서 학적부를 보게 되었다. 농사일을 돕던 그 소년의 출결일수가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고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시오리 산길을 따라 학교를 오가며 나무땔감을 해서 팔아 학비를 마련하셨다고 했다. 사실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내 유년의 가난이란 것도 아버지에 비하면 행복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가난과 슬픔을 유산으로 남겨주셨지만 그것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아버지, 분명 극락왕생하셨을 것이다.



정일근은

1958년 경남 양산 출생.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를 발표해 데뷔했다. 지금은 울산 정족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겨 전원 속에서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경주 남산’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가족’ 등이 있다. 시와 시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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