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쓰러지기 1주일 전 녹음 테이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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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 쓰러지기 1주일 전 녹음 테이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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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릴케는 역사를 뛰어넘은 시인"

넉 달째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시인 김춘수(82.사진)씨가 쓰러지기 꼭 일주일 전인 7월 28일 후배 시인들과 점심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녹음된 테이프가 공개됐다. 경기도 남양주의 한 음식점에서 녹음된 테이프는 약 60분 분량. 부인과 사별(1999년)한 뒤 쓸쓸해 하던 김씨는 2~3년 전부터 서정춘.조영서.노향림 시인 등과 일주일에 한차례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왔다.

이날도 그런 모임 중 하나였으며, 테이프는 대화가 무르익자 김씨의 제자 시인 류기봉(39)씨가 녹음한 것이다. 반주를 겸해서인지 대화는 시와 예술, 역사.현실.건강 등 여러 주제들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러나 문학이 주제였을 때는 김씨가 주로 말하고 후배들이 묻곤 하는 문답식으로 이어졌다.

대화 중간부터 녹음된 테이프의 첫 부분. 김씨는 "미당이 '마흔 다섯은/귀신이 와 서는 것이/보이는 나이'라는 시('마흔다섯')도 썼듯이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 자신의 내면을 보는 사람"이라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당의 시에 나오는 귀신은 결국은 내면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릴케나 미당이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그러나 "지용 같은 시인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역사의 눈이 미래를 보려고 한다면 시의 눈은 과거, 이미 끝난 세계를 바라본다"고 말했다. '끝난 세계'란 인간에 주어진 운명, 이승에 나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듯이 저승에 가는 것도 나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또 2000년 전 예수의 세계와 지금 세계를 비교할 때 전혀 달라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김 시인은 설명했다.

그는 "때문에 진짜 시인은 역사를 무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릴케 같은 시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의 혼란 속에 살면서도 전쟁 얘기, 사회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씨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요즘의 '현실'로 흘러갔다. "요즘 진보.보수를 말하는데 의식의 진보가 편리함을 가져다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인간성이 바뀌지는 않는 것이고, 때문에 시적인 입장에서 보면 지금 한국의 진보주의는 어린아이들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화제가 건강으로 넘어가자 김씨는 "(암으로 숨진)아내가 나중에는 음식도 못먹더라. 그 때 차라리 병원치료를 포기하고 독한 약을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녹음 테이프 끝부분 흥이 오른 김씨는 월간 문예지 '현대시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시 '2004년 7월 2일의 備忘(비망)'을 암송하기도 했다.

한편 김 시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과 한국전쟁 전후 교편을 잡았던 마산에서는 '김춘수 문학관'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11/9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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