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녹색시인상에 나호열(시인)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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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녹색시인상에 나호열(시인)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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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와 산문>.이 주관하는 제 6회 녹색시인상에 나호열 시인이 선정되었다. 심사위원:박태진(시인) 김용오(시인)

수상작품은 시 '북'외 20 편이다. 나호열 시인은 최근 '낙타에 관한 질문' 등의 시집을 통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는 중진 시인으로 본지 발행인을 맡고 있다. 시상식 일시와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지 않았다.

<녹색시인상 심사평>
좋은 시는 일상에 젖은 사람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짧은 시 ‘「북」’은 ‘한 마디’로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북’은 자아를 상징한다. 자기 표상으로써의 개성적인 북은 닫힌 어둠에서 열린 바깥으로 향해 있다. 짧고 깊은 소리를 내는 ‘북’은 분명한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나호열의 시는 이미지를 통해 의미성을 전달한다. 길 잃은 ‘청둥오리’를 ‘아스팔트’에 착륙시키고, 우리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 마현에서 분원리로 건너오는 불빛’은 강가에 핀 갈꽃과 함께 보는 가을의 볼거리이며, 해꽃의 끝물이다. 누구나 平心으로 시를 읽어가다가 떨리는 느낌에 빠질 때가 있다. 바로 좋은 시를 만났을 때다.
나호열은 봄과 여름 내내 떠들어대던 개개비나 오목눈이들이 자취를 감춘 곳에서 청둥오리나 고니류의 ‘발자국’을 찾고 있다. ‘용문산’, ‘옛집’, ‘가시’ ‘매화’‘, ’새’ . ‘숲’ , '길‘ , 제비꽃’ , ‘산’ , 등의 시어는 자기 존재를 찾는 이미지들이다. 이들 시편의 여행은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을 뒤돌아본다. 시인은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내적 의미를 파악하는데, 그 바탕에는 아픔이 짙게 깔려 있다.
수상 작품 대부분의 시편은 개인의 내장된 언어가 시적 형식을 통해 표출되어 있다. 이들 시는 일상에서 느끼는 정서이며 일상을 벗어나려는 양가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진실과 통찰을 찾는 구도가 높이 평가되었다.
녹색시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박태진 . 김용오>



<수상 소감>
녹색시를 위한 변명
나 호 열

오랫동안 나는 나의 시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과 탐색을 계속해 왔다. 시를 통해서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늘 낭패와 굴욕으로 끝이 났고, 그럴 때마다 목마름 가득한 여행으로 나를 유배시켰다. 수많은 마을들과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이름 모를 산과 들을 가로지르면서 생명의 비의 秘意에 몸서리쳤다. 독서를 통해서도, 지혜로 가득 찬 선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 수 없었던 진리, 이 세상이 결코 인간들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누가 저 들녘에 가득한 풀들을 감히 잡초라 부르는가, 잡초라 불리우는 저 억세고 볼 품 없는 풀들이 언제 자신들의 영역 밖을 탐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인본주의라 불리우는 이데아야말로 얼마나 가혹한 폭력과 야만을 함축하고 있는지, ‘인간적’이라는 미명하에 부풀려지는 문명의 욕망과 안락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거론할 일은 아니다. 단지 나 또한 현대문명의 달콤함 속에 빠져있는 수인 囚人에 불과하다는 낭패감이 날카로운 돌팔매질로 나에게 되돌아 왔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 뿐이다.
레이첼 카슨 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자연을 망가뜨리고 결국은 부메랑처럼 인간을 포함한 생명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고매한 학자도 아니면서 살충제 DDT의 폐해를 고발한 한 여성의 집념이 시로써 자아를 찾고 생명의 비의를 노래하려는 나 같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문명의 폐해를 알면서도 그 거미줄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야유는 결국은 나 자신을 뜨겁게 껴안으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그 순간에도 그 자연을 핍박하는 모순은 견디기 힘든 수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소로우처럼 깊은 삼림에 은거하며 자연을 느끼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되새기기에 오늘의 현실은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 자신을 비롯한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일이 말살되어 가는 자연의 숨결을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절실하다는 생각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오랜 망설임 끝에 이 세상의 모든 시는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에 바쳐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자칫 종교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지거나 서투른 달관의 경지로 숨어들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인간은 자연에게 자신이 누려왔던 지위를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지구를 왜 초록별이라고 하는가? 공기와 태양의 빛과 열, 그리고 물이 어우러져 만드는 생명이 바로 그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와 태양과 물은 생명 그 자체에게 조건없이공평하기 때문이다. 녹색이 주는 평화와 약동의 이미지는 21세기를 여는 시의 지평이 될 수 있다. 과거로,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절욕을 통해서 자연의 품에 안긴 불편한 인간이 될 수는 있다. 아마도 21세기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의 질서는 인간만이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명사상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은 유효하다.

과연 녹색시는 존재할 수 있는지, 녹색시의 영토가 확장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녹색시의 화두를 걸머지고 있는 동도 同徒들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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