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21~23권 펴낸 시인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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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21~23권 펴낸 시인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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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0권 넘기고 싶은 욕심 … 죽을 때까지 시 쓸 것"</b>

1983년. 당시 쉰 살의 시인 고은은 열다섯 살 아래인 이상화 중앙대 교수와 백년가약을 맺고 경기도 안성시 대림동산에 신접살림을 차린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3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이듬해였다.

3년이 지난 86년. 한국문학사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다. 발단은 51편의 시.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연작시 제목은 '만인보(萬人譜)'였다. 시인은 "일만 겨레를 하나씩 시로 호명하겠다"고 선언했다. 무모해 보일 만큼 원대한 구상이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났다. 과거 장대했던 포부는 오늘 시집 23권이 되어 우뚝 서있다. '만인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시는 모두 2890수. 거의 시 한 편당 한 명씩 읊었으니 최소한 2500명의 동포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만인보'(창비) 21~23권이 출간된 건 두 주쯤 전이다. 4.19 시절을 416편의 시로 기록했다. 안성 자택으로 전화를 넣었더니 프랑스 파리도서전에 가고 없었다. 올해 두번째 외유다. 유독 해외 행사가 잦았던 지난해엔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귀국을 기다려 안성으로 내려갔다. '만인보'가 잉태된 건 80년 육군교도소 특별감방 7호실이지만, 태자리는 안성이다. 온 산하를 떠돌던 시인이 무연고지 안성에 정착하면서 '만인보'는 비로소 시작되었다. 시인 고은에게 '안성시대'는 '만인보의 시대'인 것이다.

-건강하시지요.

"감기 기운이 조금 있네요. 그래도 성의를 봐서, 가져온 술은 마셔야겠지?"

시인의 아랫입술이 텄다. 해외일정이 빡빡했나 보다. 그의 강골(强骨)은 세상이 안다지만 칠순도 한참 넘긴 나이다. 타고난 탁성(濁聲)이라지만 시인의 육성은 자주 갈라졌다. 하나 술잔 바라보는 표정은 여전히 해맑았다.

-올해도 많이 바쁘시지요.

"올해는 되도록 외유를 삼가려 합니다. '만인보' 써야지. 너무 오래 끈 것 같아요."

거실 벽에 올해 일정이 붙어있었다. 4월 미국, 6월 영국, 9월 미국 시인축제. 최대한 줄였다는 게 이 정도다.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위원장' 관련 업무로 인한 방북과, 올해 제주도에서 개최하려고 협의 중인 '남북작가대회' 관련 일정은 뺀 것이다.

-'만인보' 출간이 애초 계획보다 꽤 늦어졌습니다.

"이것저것 해찰 부리다 그랬지. 시인을 내버려두지 않는 세상이잖소.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80년대에 끝냈으면 그때 시선에 머물렀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느리고 완만하게 써온 게 오히려 잘한 게 아닌가 싶소이다. 여러 시각을 전달할 수 있었으니까."

-30권에서 끝낼 계획이시지요.

"80년대 말인가. 시집 한 권에 100명씩, 어림잡아 3000명 정도에서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했지요. 계획도 다 잡혀있습니다. 24권부터 27권까지는 산중 얘기, 나머지는 80년대 얘기. 산중 얘기 초고는 진작에 마무리했고요. 내년 말까지는 30권 초안도 끝낼 생각입니다. 한데 요즘 은근히 욕심이 생깁디다. 시간만 있으면 더 하고 싶다는 욕심. 솔직히 임종 직전까지 쓰고 싶습니다(여기서 '산중 얘기'는 승려 시절을 가리킨다. 그는 51~62년 승려였다. 승려 시절인 58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한다)."

'만인보' 연작이 30권을 넘을 것이란 발언은 뉴스다. '만인보'는 시대를 나눠 출간됐다. 1~9권은 30~40년대 어릴 적 기억을 담았고, 10~15권은 70년대를, 16~20권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옮겼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90년대 이후는 '만인의 족보'에서 빠지는 것이었다.

옥중의 시인은 다짐했다.'내가 만약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와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로 쓸 것이다('만인보에 대한 작가수첩', 1992년).'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 닿았던 뭇 인연과의 정리(情理)를 털어내려는 지금,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인연들 자꾸 눈에 밟히는가 보다. 스무 해 넘게 붙잡았던 화두, 내려놓으려 하니 서운한가 보다.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뜨거운 날들이 이어졌다/목이 탔다//이제 마산은 방방곡곡이었다'('김주열' 부분, '만인보' 21권)

4.19혁명을 즈음한 시절을 노래한 이번 시집엔 김주열 열사처럼 알려진 이름만 있는 게 아니다. 동대문구청 앞 시위에서 숨진 중앙철공소 공원 고해길 등 무수한 무명씨들이 시대를 증언한다. "옛날 일을 어찌 이토록 세세히 복원하셨습니까?" 물었더니 냉큼 앞장서 서재로 향한다.

서재엔 책상이 셋 있었다. 하나는 잡무용 책상, 하나는 '그냥 시'를 쓰는 책상, 그리고 복판의 낮은 책상이 '만인보 책상'이다. 책상 위에 쌓인 책과 자료가 앉은 키보다 높다. 시인은 "4.19 관련 논문만 10권 넘게 참고했다"고 말했다.

"'만인보'는 문학입니까, 기록입니까?" 물으려다 말았다. 시인의 오래전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작시를 문학으로 읽으나 시대로 읽으나 그것을 내가 개의치 않겠다('만인보' 10권 머리말)."

안성=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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