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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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펴내

靑山 0 3515
“한동안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에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해야 시를 쓰는데, 그때는 사람들이 보기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다시 시가 써졌어요. 다시 태어난 기분입니다.”

4년 만에 신작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사진)을 펴낸 최영미 시인(48)은 “시집을 내고 이렇게 설레는 것은 첫 시집 이후 처음”이라며 미소지었다. 1994년 펴낸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스타’가 된 후 나머지 세월을 “설거지하며 살았다”지만 이제 다시 시작점에 선 듯하다.

2005년 발표한 <돼지들에게>는 위선적인 지식인을 날카롭고 아슬아슬하게 풍자한 시집인데, 당시 ‘돼지’와 ‘진주’가 누구인지에 대해 무성한 소문을 낳았다. “사람들이 시적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가십으로 치부했다”는 최씨의 말에서 지난 4년간 그를 들썩이게 했던 상처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외부로 향했던 날카로운 칼날을 거뒀다. 대신 지난 삶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차분하고 깊은 시선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일렁이던 물결 속의 불순물이 가라앉은 후 보여지는 연못 바닥처럼, 그는 투명한 시선으로 상처가 남긴 흉터, 미처 아물지 못해 핏자국이 남아 있는 생채기를 바라본다.

“가지 말라는/ 길을 갔다// 만나지 않으면 좋았을/ 사람들을 만나고// 해선 안 될 일들만 했다”(‘청개구리의 후회’)며 “뚜껑이 열리면 걷잡을 수 없어/ 두 번 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보낸 편지함’)라고 과거를 후회하고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화산이 타고 남은/ 재에 묻힌”(‘어떤 동문회’)이라고 자신을 묘사한다.

그러나 후회와 괴로움 속에서도 시인은 결국 지금의 자신을 만든 과거를 긍정하고 생의 의지를 밝힌다.

“예술가에게도 도청 공무원의 품성을 요구하고/ 시인도 지방 면서기의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남는 한국사회에서// 내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불안한 자아./ 기우뚱거리는 배에 투자하려는 선주(船主)는 없다고/ 누군가 내게 충고했다…// 어차피 사람들의 평판이란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눈금 같은 것./ 날씨가 화창하면 아무도 온도계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나쁜 평판’)

상처받고 쓰러진 시인의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결국 시다. 열여섯 살 일기장에 끼적였던 시를 발견하고 “신성모독을 범했던 반항아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사원에서의 맹서를 되새긴다. 그대 오묘한 자연이여. 인생의 신비여. 나는 보았노라! 외칠 수밖에. 뒤로 물러나지 않고, 종이 위에서 눈을 맞는 시인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아끼지 않고”(‘1977년 12월7일’)라고 읊조리는 그에게서 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자각이 강하게 느껴진다.

최씨의 시선은 개인적 상처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로 나아간다. 촛불집회(‘2008년 6월, 서울’),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전쟁(‘글로벌 뉴스’) 등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놓지 않는다.

등단 17년, 시 때문에 주목받고 시 때문에 상처받은 그에게 시란 무엇일까. “정말 모르겠고, 그 질문을 밤마다 한다”고 답한다. 그에게 시는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여기에서 저기로’)을 이끌고 가는 힘이다.
<글 이영경·사진 김창길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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