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돌쩌귀 사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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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시 모음> 정일근의 '돌쩌귀 사랑' 외

정연복 0 11561
<사랑에 관한 시 모음> 정일근의 '돌쩌귀 사랑' 외

+ 돌쩌귀 사랑

울고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을 내고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이 되고 나는 문짝의 수짝이 되어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 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 같은 사랑 한 번 해보자
(정일근·시인, 1958-)


+ 화살처럼

명중하리라
관중(貫中)하리라, 마음먹고
시위를 떠난다

비명 소리 홀로 남겨 놓은 채
떠나온 길

오늘도 길을 따라 날아간다
내 막무가내 사랑
(이기윤·시인, 1936-)


+ 꽃비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여
마음에 그 사랑을 들이기 위해
낡고 정든 것은
하나 둘 내치시기를

사랑은 잃어가는 것이다

보라,
꽃잎도 버릴 때에
눈이 부시다 
(홍수희·사랑)



+ 목숨의 노래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문정희·시인, 1947-)


+ 식물성 사랑

나무는
가까이 서 있는 두 나무는
서로에게 팔을 뻗어도
껴안지는 않습니다.
닿을 듯 가까이
알맞은 거리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기뻐할 뿐
팔을 뻗어 힘껏 잡지는 않습니다.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
땅에 그림자 나란히 드리우고
하늘 아래 걸어갑니다.
그대 가슴으로 팔을 깊이 뻗는다는 것은
그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
그대를 두 팔로 껴안는다는 것은
그대를 품속에 두고 태양빛을 가리는 일.
땅 속으로 깊고 은밀히
영혼의 뿌리를 얽고
강물처럼 속삭이며 흘러 별까지
서로를 마음으로만 가지는 나무
서로를 눈으로만 가지는 두 나무
(이성선·시인, 1941-2001)


+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도종환·시인, 1954-)


+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本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이기철·시인, 1943-)


+ 너에게는 나의 사랑이 필요하다

너는 내가 생각해주는 만큼
아름다워지는 거야
나의 그리움이 너를 만들지.
눈, 코, 입, 너의 마음까지도
 
어느 날 너는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숨쉬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너는 한 그루 작은 나무
나의 그리움으로 자라는
푸른 식물
 
내가 가꾸는 만큼 아름다워지고,
내가 꿈꾸는 만큼 눈부셔가는
아름다운 너는
나의 한 그루 기쁨의 나무
내 몸 안의 새살
 
네 앞에 서면 내 가진 것 다 주고 싶다.
다 주고도 기쁠 수 있다.
 
내가 생각해주는 만큼 아름다워지는
너는 나의 반쪽,
외로운 너에게는 나의 사랑이 필요하다
(윤수천·시인, 1942-)


+ 사랑이라는 것

소 두 마리가
풀밭에 마주 서서
서로의 등을 핥아 주고 있습니다
긴 혀를 내밀어
이마와 얼굴과 목과 등을
말끔히 닦아 주고 구석구석 핥아 줍니다

두 녀석은
친구 사이인지
어미와 자식간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진 암수 놈인지
얼른 분간이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두 녀석은
서로 핥아 주고 몸 부비는 동안
외롭지 않습니다
그 어떤 힘들고 고달픈 일 있어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이 광막한 대 초원에
오직 그들 두 마리뿐이라 해도
세상은 가득할 것입니다
(이동순·시인, 1950-)


+ 사랑하는 사람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박재삼·시인, 1933-1997)


+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 다시 겨울이 와서
큰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 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을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에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이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만 벌써 봄 향기 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나태주·시인,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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