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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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시 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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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안거

지수기 0 633
우안거(雨安居)


가고 오는 것은 길 가운데 있지 않다.
마음은 길 위에 머물고
그 길의 끝은 견고한 평온에 닿아 있다. 

가지런한 돌담길 중간 즈음에 활짝 열린 대문
비 내리는 여름, 능소화 몇 송이 피우는 와편 굴뚝
대청에 오르면 살아있는 대들보, 서까래
창호지 곱게 바른 띠살문에 고운 햇빛 속살 들여놓고
한여름 잠 못 자던 밤이면, 맑은 대쑥 베어다 모깃불 피우고
소반의 찐 감자 먹으며 평상에 누워
입 속으로 떨어지는 별과 놀던 밤.

온돌방 이불장에는
목화솜 두둑 깐 정갈한 침구가 고이 놓이고

돌담장 안으로 징검다리 건너며 푸른 풀 밟으면
비 개인 연못에는 붕어떼, 늘어진 개연꽃잎 물 위에 뜨고
우물 옆 오동잎사귀 아래로
좁쌀풀, 여주, 물속새, 바랭이풀, 줄풀 푸른 빛
장독대 지키는 돌절구
뒤 안을 적막으로 수놓은 질경이, 민들레, 채송화. 

댓잎 아래 부는 바람은 동박새 흔들고
후원 정자 다실에 앉으면, 벌레소리 그윽한 여름
햇살은 낯선 길처럼 늘어진 행복했던 그 집에는
친구 보내고 낮잠 드는 낡은 나무 그네 하나
겸손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킨다.

나를 놓은, 생의 길목에서
오래된 그 집 정원을 다시 들여다보니

감나무, 무화과는 담장 넘어 다른 세상 꿈꾸고
늙은 춘양목 한그루, 옛 가지에 그리움 드리운 채 ,
초당에 들던 유년의 그 첫날처럼 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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