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통 같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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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 같은 세상

김재훈 0 384


똥통 같은 세상

나이 먹으며 알게 된 것은
내가 높은 꿈보다 낮은 똥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쯤 내 똥이
얼마나 무르익어 어느 선까지 내려와 있는지
아는 것이다 어려서는 며칠에 한번씩 싸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날마다 먹은 만큼은 똥을 싸는 게
건강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크게 배설하는 일보다 조그만 변기 위에 앉아
힘주어 굵은 똥 싸는 일이 그나마
세상을 위해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것들보다 그 위대한 것들이 싸놓은
똥을 연구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 진솔할 것이다
먹은 만큼도 싸지 못하는 불구의 기계들이
어딘가 얹혀 세계를 병들게 하는
이 똥통 같은 세상에서
당신이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나는 검게 그을린 똥을 구웠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철학을 했다면
나는 똥을 했다고 할 것이다 

가장 긴 촛불은 평택 대추리 촛불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800일 동안 촛불을 켰다
한반도는 동북아 전쟁기지가 아니라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다국적 전쟁기계들에게 내어줄 순 없다고
포클레인에 철거당하는 대추초교를 부여안고 울었다
700명이 지키는 대추초교를 감싸고
1만 5천명의 군경이 몰려오던 5월 4일 새벽
처음으로 손에 든 촛불을 놓고 죽봉을 들었다
이것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허공을 향해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도 따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대추리에서 쫓겨나오자
한미 FTA 떼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FTA는 일터 하나를 뺏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쌀과 영화와 의약품과 방송만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가치를 빼앗은 것이었다
경쟁력 없는 인생인 인생이 아니라는 말
경쟁력 없는 대지는 대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를 뛰었다
싸움이 가물가물해질 때 허세욱 열사는
자신의 몸을 심지로 내놓았다
그는 우리 모두의 양심을 끝까지 소진케 했다
 
그렇게 몇년 나는 지난 시절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를 들던 손에
촛불을 들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서성였다
촛불은 진화하면 화살촉이 되는 걸까
들불이 되는 걸까 때로는
백만 촛불로 광화문을 뒤덮어보기도 했지만
광장은 다시 차벽과 공권력의 폭력에 밀리고
나는 다시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해
그들이 오른 구로역 CC카메라탑 아래에서
콜트ㆍ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오른
양화대교 천변 고압 송전탑 아래에서
다시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아래에서
순한 촛불 하나를 들고 있다
 
단 한번도
민중 무력 없이 세상이 바뀐 적은 없다고
청원으로 민주주의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불붙은 심장의 열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끔 촛농처럼 뜨거운 눈물 몇방울 떨구며
순한 촛불 하나를
어두운 밤 보탠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창비, 2015년(초판 16쇄), 106~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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