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랑 시의 백과사전 > 시사랑 > 똥통 같은 세상

똥통 같은 세상
 
    · 트랙백 주소 : http://poemlove.co.kr/bbs/tb.php/tb24/11678
    · 글쓴이 : 김재훈     날짜 : 18-08-15 04:48     조회 : 23    
    · : 똥통 같은 세상
    · 저자(시인) : 송경동
    · 시집명 :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출판연도(발표연도) : 2015
    · 출판사명 :


똥통 같은 세상

나이 먹으며 알게 된 것은
내가 높은 꿈보다 낮은 똥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쯤 내 똥이
얼마나 무르익어 어느 선까지 내려와 있는지
아는 것이다 어려서는 며칠에 한번씩 싸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날마다 먹은 만큼은 똥을 싸는 게
건강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크게 배설하는 일보다 조그만 변기 위에 앉아
힘주어 굵은 똥 싸는 일이 그나마
세상을 위해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것들보다 그 위대한 것들이 싸놓은
똥을 연구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 진솔할 것이다
먹은 만큼도 싸지 못하는 불구의 기계들이
어딘가 얹혀 세계를 병들게 하는
이 똥통 같은 세상에서
당신이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나는 검게 그을린 똥을 구웠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철학을 했다면
나는 똥을 했다고 할 것이다 

가장 긴 촛불은 평택 대추리 촛불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800일 동안 촛불을 켰다
한반도는 동북아 전쟁기지가 아니라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다국적 전쟁기계들에게 내어줄 순 없다고
포클레인에 철거당하는 대추초교를 부여안고 울었다
700명이 지키는 대추초교를 감싸고
1만 5천명의 군경이 몰려오던 5월 4일 새벽
처음으로 손에 든 촛불을 놓고 죽봉을 들었다
이것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허공을 향해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도 따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대추리에서 쫓겨나오자
한미 FTA 떼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FTA는 일터 하나를 뺏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쌀과 영화와 의약품과 방송만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가치를 빼앗은 것이었다
경쟁력 없는 인생인 인생이 아니라는 말
경쟁력 없는 대지는 대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를 뛰었다
싸움이 가물가물해질 때 허세욱 열사는
자신의 몸을 심지로 내놓았다
그는 우리 모두의 양심을 끝까지 소진케 했다
 
그렇게 몇년 나는 지난 시절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를 들던 손에
촛불을 들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서성였다
촛불은 진화하면 화살촉이 되는 걸까
들불이 되는 걸까 때로는
백만 촛불로 광화문을 뒤덮어보기도 했지만
광장은 다시 차벽과 공권력의 폭력에 밀리고
나는 다시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해
그들이 오른 구로역 CC카메라탑 아래에서
콜트ㆍ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오른
양화대교 천변 고압 송전탑 아래에서
다시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아래에서
순한 촛불 하나를 들고 있다
 
단 한번도
민중 무력 없이 세상이 바뀐 적은 없다고
청원으로 민주주의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불붙은 심장의 열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끔 촛농처럼 뜨거운 눈물 몇방울 떨구며
순한 촛불 하나를
어두운 밤 보탠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창비, 2015년(초판 16쇄), 106~110쪽


작품 검색   
번호 제목 저자 조회수 등록일 글쓴이
2069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권혁웅 15 09-29 김재훈
2068 성(性)의 역사  권혁웅 23 09-29 김재훈
2067 권태주의자  김도언 20 09-25 김재훈
2066 동물의 왕국 1  권혁웅 10 09-25 김재훈
2065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 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서정주 56 08-31 김재훈
2064 아버지 생각74  이데레사 42 08-27 김재훈
2063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48 08-27 김재훈
2062 얼굴 반찬  공광규 38 08-27 김재훈
2061 공무도하가  류근 37 08-24 김재훈
2060 첫사랑  류근 43 08-24 김재훈
2059 슬픔의 작은 섬  진은영 36 08-23 김재훈
2058 풍선  문효치 21 08-22 최영화
2057 첫눈  권혁웅 28 08-21 김재훈
2056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24 08-21 김재훈
2055 사냥 -낙태시술자  문혜진 21 08-21 김재훈
2054 독작(獨酌)  류 근 40 08-20 김재훈
2053 너무 아픈 사랑  류근 50 08-17 김재훈
2052 스윙  여태천 23 08-16 김재훈
2051 부서진 활주로  이하석 33 08-16 김재훈
2050 똥통 같은 세상  송경동 24 08-15 김재훈
2049 무서운 굴비  최승호 35 08-14 김재훈
2048 연혁(沿革)  황지우 24 08-14 김재훈
2047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49 08-13 김재훈
2046 우리 동네 구자명씨  고정희 22 08-12 김재훈
2045 검은 표범 여인  문혜진 37 08-11 김재훈
2044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고정희 24 08-11 김재훈
2043 (지나간) 청춘에 보내는 송가 1.2.3,4  송경동 34 08-11 김재훈
2042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김민정 32 08-10 김재훈
2041 젖이라는 이름의 좆  김민정 47 08-10 김재훈
2040 서서소문 공원에는  곽문환 33 07-03 곽문환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