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치 시 모음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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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치 시 모음 21편

김용호 0 1500
문효치 시 모음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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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대

문효치

베어지는
갈대의 뼈 속에
거센 강이 흐른다.

소리가 될 수 없는
갖가지 함성,
불꽃이 될 수 없는
온갖 뜨거움이

빳빳한 강이 되어
거세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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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대

문효치

달빛 중에서도
산이나 들에 내리지 않고
빨랫줄에 내린 것은 광대다

줄이 능청거릴 때마다 몸을 휘청거리며
달에서 가지고 온 미친 기운으로 번쩍이며
보는 이의 가슴을 조이게 한다

달빛이라도
어떤 것은 오동잎에 내려 멋을 부리고
어떤 것은 기와지붕에 내려 편안하다
또 어떤 것은 바다에 내려 이내 부서져 버리기도 한다

내가 달빛이라면
나는 어디에 내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는 일이 아슬아슬한 대목이 많았고
식구들은 가슴 조이게 한 걸로 보면
나는 줄을 타는 광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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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강산 가던 철길

문효치

6검문소 어디쯤
철길은 아직도 깊은 총상을
전신으로 앓고 있었다.

지뢰밭에 엎디어
붉은 흙에 코를 박고

까마득한 기억 속에
오르내리던
유람객의 이야기를
되씹고 있었다.

문득, 흙 속에 뒤섞인
화약 냄새에
잠시 토악질을 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가을볕에 말라가는
갈잎 끌어당겨
부스러지는 몸을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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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팔꽃

문효치

담벼락을 부여잡고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한사코 달아나는 하늘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나팔 소리에 귀 시끄러운 세상
이제도 더 불러야 할 노래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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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을

문효치

노을 저 편에 무엇이 있을까
피어나는 노을을
바라보다가 바라만 보다가
솟구치는 설움을 삼킨다.

곱게 기르던 새 한 마리
파드득 파드득 날아가
노을 속에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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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늦가을

문효치

나는 지금
갈비뼈 하나를 앓고 있다.

억만의 저
자작나무잎사귀들
모두 흔들어 흙으로 보내고

이제 속 빈 수수깡이 되어
바람의 손톱으로 퉁기기만 해도
툭툭 부러지며
병 같은 사랑 하나 얻어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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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단풍

문효치

노오란 바람을 걸치고
파르르 떨고 있는 나무
가지 끝에서
한 덩이의 폭죽이 터진다.

한 점 연기도 없이
오직 불덩이로만
타오르는 나무.

일순에 개벽하는
하늘의 살점이
순수의 기둥에
단맛의 과길로 열린다

이윽고, 내 가슴의 무논에
첨벙첨벙 뛰어들어 안기는
낙과.

보석처럼 영근 씨앗이 되어
뛰어들어 안기는
오, 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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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말 칼

문효치

입은 칼집이다
입을 열면 이내 칼이 나온다

자칫 자상(刺傷)을 입으면
몸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잘려나간다

거리엔 칼들의 난무
4월의 낙화처럼 아까운 영혼들이 떨어진다

문명의 발달은 무기의 발달도 데려온다
민주 ? 자유가 보장되더니 말 칼도 진화한다

사람들은 입 속에서
칼날을 갈고 또 간다

칼침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 자기의 칼을 잘 갈아놓아야 한다

미국인들이 총기를 함부로 쏘아대듯
한국인들은 이 칼을 아무데서나 휘두른다

이젠 칼이 아니라 다연장 포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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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방동사니

문효치

방동사니에
손가락을 벤적이 있었다.

벤자리에 방울방울 솟아오른 피가
내 유년의 한마디를 온통 적시고 있었다.

줄기 하나에
수십개의 날선 칼을 달고
내 손가락 뿐만아니라

구름의 손가락 바람의 다리
하늘의 몸통을 베고 있었다.

그까이꺼, 풀 풀하면서 업신여겼던 그 풀에
나는 그만 풀이 죽어 울면서
붉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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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병에게

문효치

너에게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끔 이름은 바뀌었지만
평생 내 몸 속에 들어 나를 만들고 있었지
이런즉 병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터
어머니가 나를 낳고 네가 나를 길러주었다
이제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노라 쓰기 위해선
내가 병을 가장 사랑한다라고 쓰면 된다
뭐든 오래 같이 있으면 정이 든다
평생을 함께 한 너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정들면 예뻐 보이는 법
야, 너 참 예쁘구나
세상이 모두 나를 버리려 하는 겨울의 문턱에서도
너는 내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구나
밭은기침으로 살과 뼈의 아픔이 잦아들지만
마음의 병도 함께 살고 있다
변치 않는 평생의 벗
오늘은 너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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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비천

문효치

어젯밤 내 꿈속에 들어오신
그 여인이 아니신가요.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 있는
내 꿈의 문을 살며시 열고서
황새의 날개 밑에 고여 있는
따뜻한 바람 같은 고운 옷을 입고

비어 있는 방 같은 내 꿈속에
스며들어오신 그분이 아니신가요.

달빛 한 가닥 잘라 피리를 만들고
하늘 한 자락 도려 현금을 만들던

그리하여 금빛 선율로 가득 채우면서
돌아보고 웃고 또 보고 웃고 하던
여인이 아니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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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람은 가고

문효치

나를 잠시 만나고
가는 사람.

앓아 누운 내 영혼에 들어
서늘하게 한줄기 금을 그어 놓고
떠나는 사람.

사람은 가고, 그 자리에 남는
허허로운 벌판에
무지개가 갈잎처럼
부서져 내린다.

찻집 「수정水晶」을 나와
숲으로 이어 가던 길은
바람도 뚫고 지나갈 수 없는
견고한 어둠으로 막혀버리고

달빛도 스며들지 못하고
벌레 소리도 새어들지 못하는
황량하게 남는
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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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랑 법

문효치

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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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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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침

문효치

해는
새로 태어나는 꽃의 ?
짧고 다정한 목숨을 위해
촉촉한 화판을 걸레질하고
꽃술의 심지에 불을 지피고
그리고
퀄퀄퀄퀄
부신 색소를 부어주고 있다.
해는
짧고 다정하여 서러운
목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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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절 풍경

문효치

빈 마당엔
옷 벗은 백일홍나무
겨드랑이 밑으로 지나가는 세월이 간지러워
용틀임하고 있다.

당간 꼭대기에 걸린
흰 구름 한 장
펄럭이다 해어지고

졸음에 감기운 여승의 독경소리에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비스듬히 기대어 잠드는데

부처님은 긴 가부좌 헐고 법당에서 나와
산죽 잎사귀에 배어
지워지지 않은 어젯밤 달빛에
눈맞추고 계신다.

대웅전 팔작 지붕 위 동박새 한 마리
주문진 앞 바다에서 막 길어온
푸른 물감 하늘에 퍼부어 색칠하는데

행여 검은 그림자
이 평화 깨뜨릴까 두려워
나는 바삐 절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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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지리산 시

문효치

- 천왕봉

산은
冠을 쓰고
의젓하게 앉아 있더라.

수많은 풍상이
할퀴고 지나갔지만
산은 꿈쩍도 아니한 채
잔기침 몇 번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더라.

기슭에 가득
크고 작은 생명들을 놓아기르며
수염 쓰다듬고
앉아 있더라.

긴 장죽에
담배 연기 피워 올리며
스르르 눈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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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탄생

문효치

흰 눈의 원무를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지상엔 기쁨으로 충만케 하소서.

어느 응달, 어느 그늘에도
간직하여 받들고 온
풍요한 생명의 빛이 스미게.
한 아비의, 한 어미의
아들이면서
우리를 지탱하여 키워 온
山, 흙덩이마다의
바다, 물방울마다의
또한 아들이게.

탄생의 기쁨은
그 할머니, 그 어미에게만이 아니라
이렇게 눈을 맞고 있는
모든 사람의 머리에까지
와서 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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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파도

문효치

파도는
힘을 가지고
섬을 부추겨 일으키고 있구나.

섬을 일으켜
푸르게 높게 떠올리고 있구나.

가슴속에서
출렁거리는 사랑이여,
네 힘이 스러지면
나는 곧 한 사발의 물에 불과함을,
엎질러지는 물에 불과함을,

파도는 몸으로 말하고 있구나.
바위에 몸을 던져 깨뜨리면서
말하고 있구나

섬이 가라앉을까 두려워
파도는 그 신잡힌 몸짓을 멈추지 못하고

사랑이여,
한 사발의 물을 엎지르지 않기 위해
나에게서 떠나지를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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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풍선

문효치

나는 풍선이어요.
가슴속에서 꿈꾸던
사랑같은 건 모두 꺼내 팽개치고
다만 속이 텅 빈
풍선이어요.

나는 되도록 가벼워야 해요.
사랑을 품으면 무거운 번뇌가 자라서
뜰 수가 없어요.

사랑으로 얼룩진 가슴을 후벼내고
그 자리에 푸른 허공을
한 바가지 퍼 담아 가지고
그저 높이높이 오르기만 해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아요.
투명한 하늘을 향해
그저 위로위로 오르기만 해요.

아무의 눈에도 들지 않는
까마득히 높은 곳
잠시, 하늘의 변두리를 헤매다가
마침내 여기서 몸을 깨뜨려 사라지면
정말, 눈물 한 방울 티끌 하나도
남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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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항아리

문효치

텅 비어 있다.
손끝에 닿으면 차가운 어둠,
치밀한 수염이 돋는다.
두드리면
메아리 쳐 우는 울음,
황량한 오장육부의
아스라한 깊이 속에서
외롭게 자아올리는 소리
아가리에 맴도는
서러움의 영혼이
투명하게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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