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수시모음 15편
김용호
0
578
2020.11.09 07:30
정성수시모음 15편
☆★☆★☆★☆★☆★☆★☆★☆★☆★☆★☆★☆★
《1》
1월의 시
정성수
친구여
최초의 새해가 왔다.
이제 날 저무는 주점에 앉아
쓸쓸한 추억을 슬퍼하지 말자.
잊을 수 없으므로 잊기로 하자.
이미 죽었다.
저 설레이던 우리들의 젊은 날
한마디 유언도 없이
시간 너머로 사라졌다.
스스로 거역할 수 없었던
돌풍과 해일의 시절
소리 없는 통곡과
죽음 앞에서도 식을 줄 모르던 사랑과
눈보라 속에서 더욱 뜨거웠던 영혼들
지혜가 오히려 부끄러웠던 시대는 갔다.
친구여, 새벽이다
우리가 갈 길은 멀지 않다.
그믐날이 오면 별이 뜨리니
술잔이 쓰러진 주점을 빠져나와
추억의 무덤 위에 흰 국화꽃을 던지고
너와 나의 푸른 눈빛으로
이제 막 우주의 문을 열기 시작한
저 하늘을 보자
지치지 않는 그 손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야 할 또 다른 길 위에
오늘도 어제처럼
투명한 햇빛은 눈부시리니.
☆★☆★☆★☆★☆★☆★☆★☆★☆★☆★☆★☆★
《2》
2월의 시
정성수
자, 2월이 왔는데
생각에 잠긴 이마 위로
다시 봄날의 햇살은 내려왔는데
귓불 에워싸던 겨울 바람소리 떨치고 일어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저 지평선 끝자락까지 파도치는 초록색을 위해
창고 속에 숨어있는 수줍은 씨앗 주머니 몇 개
찾아낼 것인가
녹슨 삽과 괭이와 낫을
손질할 것인가
지구 밖으로 흘러내리는 개울물 퍼내어
어두워지는 눈을 씻을 것인가
세상 소문에 때묻은 귓바퀴를
두어 번 헹궈낼 것인가
상처뿐인 손을
씻을 것인가
저 광막한 들판으로 나아가
가장 외로운 투사가 될 것인가
바보가 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
《3》
가을 엽서
정성수
가을이다 소녀야
먼 어느 날
네가 나를 이 땅에 낳았을 때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이 깊어
이 가을에도 나는 네 곁을 서성이며
하늘에 매달린 사과알을 두 손에 받쳐들고
너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열리는
탄생과 죽음의 몸부림을 보느니
소녀야
너는 오래오래 늙지도 말고
그 자리에 그렇게 하늘 이고 서서
들녘의 바람을 재우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낳도록 하렴.
☆★☆★☆★☆★☆★☆★☆★☆★☆★☆★☆★☆★
《4》
가을엔 빈손으로
정성수
가을엔 돌아가야지
여름날의 장작불을 바닷가에 묻고
지난봄에 심은 이름 없는 씨앗 곁으로
다시 떠나야지
흙바람 속 달리며 눈멀고 귀 먹어
오래오래 잊었었구나
겨울 밤 문풍지를 흔들던 몸부림도
새벽이면 꿈 밖으로 흩어지던
날개옷의 깃털들도
아아, 뜨겁게 자랐을까
저 어두운 땅 속 깊이 뿌리 내리고
보이지 않는 잎사귀 펼쳐 들고
한 뼘 더 해 가까이 줄기를 키우고
가을 사람들이
시린 눈으로 바라보는 하늘 아래
작은 기도만한 과일 한 알
지나온 길이 오지 않는 그리움이듯
돌아오는 길 또한
얼마나 설레는 것이랴
숨은 기억마다 눈을 뜨면서
이 가을에 비어있는 손
선악과에 닿는 이브의 손길 마냥
고요히 떨고 있구나.
☆★☆★☆★☆★☆★☆★☆★☆★☆★☆★☆★☆★
《5》
고독한 신의 그림자
정성수
은하계 너머
또 다른 은하계 너머
다시 먼 은하계 너머
터무니없이 아득하고
더욱 아득한
끝없이
끝이 없는 우주의
외딴섬 같은 핵의 자궁으로부터
신의 손짓 내려와
내 숨소리 곁에서 출렁인다
어깨가 많이 굽은
깡마른 독수리처럼 앙상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오래오래 웅크리고 앉아있는
저 고독한
신의 그림자 하나.
☆★☆★☆★☆★☆★☆★☆★☆★☆★☆★☆★☆★
《6》
고해苦海
정성수
괴롭다고 가슴을 치는 꽃이 어디 있으며
울고싶다고 날개를 접는 나비가 어디 있으랴
인간들만이 괴롭다고 한숨을 쉬고
울고싶다며 울 데를 찾아 나선다
세상일이란 괴롭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괴로운 것
울고싶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눈물나는 것
괴롭지 않은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
울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도
불쌍한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가부좌를 틀고 계시는 부처님도
죄 많은 중생들을 위하여 풍경소리를 내고 있다
술잔을 앞에 놓고 두 눈을 감고 있는 것도
다 괴로움 때문이고
한 잔 술에 위로를 받는 것도
다 울고 싶기 때문이다
쇠붙이도 담금질을 참아내야 비로소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괴로워서 사람이다 울고 싶어서 인간이다
☆★☆★☆★☆★☆★☆★☆★☆★☆★☆★☆★☆★
《7》
내 인생의 힘
정성수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는
금송아지가 있다고 뻥을 쳤습니다.
군대에 가서는
사단장이 친구 아버지라고
포를 틀었습니다.
뻥을 치면서
포를 틀면서
세월을 축냈습니다.
돌아보니
삶의 팔 할이 허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힘이었습니다.
☆★☆★☆★☆★☆★☆★☆★☆★☆★☆★☆★☆★
《8》
다시 새해
정성수
보신각 종소리
서른세 번 울리고
축복의 나라에 내려선 해방동이
어느새 부끄러운 애비가 되고
캄캄한 떠돌이별 저쪽으로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한 해
꽃잎처럼 산산히 흩어져 버리고
다시 낯선 새해
깊은 밤 길을 달려 떠오릅니다
우리가 태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보내지 않아도 세월은 스스로
어디론가 저 홀로 깊어 가지만
사라져간 뒷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그리운 것
가령 그것이
떨리는 우리의 넋을 잠시 해체시킨
선지피 묻은 손짓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힘은
희망이라는 이름이
해진 주머니 속에 늘 감춰져 있다는 것
저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달려오는
새해의 가쁜 숨소리에 귓바퀴 열면
아득히 잊어버린 심장이
다시 살아 뛰는 소리
가느다란 실핏줄 속마다
붉은 피톨 부딪치는 소리
아내는 누워서
천장의 희미한 꽃무늬를 헤아리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고
어린 하영이는
제 어미의 팔뚝 위에
무심한 하루를 내려놓고
난쟁이 나라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됩니다
한울님
어리석은 사나이는 어리석은 죄로
어리석게 사오나
이 아기의 애비다운 애비이게 하소서
이 젊은 여인의 지아비다운
지아비이게 하소서
지난 해처럼 슬픔은 자주 잊게 하시고
기쁨은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소서.
☆★☆★☆★☆★☆★☆★☆★☆★☆★☆★☆★☆★
《9》
세월
정성수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잡히지 않는 것은 안개뿐이 아니다
골백번도 더
맹세했던 그 사람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등을 보인다.
떠나버린 사랑은
핥으면 핥을수록 쓰디쓰고
지나 온 세월은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어지럽다.
내 마음은 평생을 그 자리인데
네 몸은 한순간에 멀리 가 있다.
☆★☆★☆★☆★☆★☆★☆★☆★☆★☆★☆★☆★
《10》
소리
정성수
아내가 돌리는 전자동 세탁기 소리는
몇 시간 낮잠을 푹 자도 된다는
아내가 좋아하는 뽕짝 같은
자장가.
그 옛날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엄마가 네 옆에 있으니
온밤
안심하고 꿈을 꿔도 좋다는
엄마가 내게 보내는
수신호.
세상의 어떤 소리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가끔은 마음속
덧난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
《11》
숲이 되지 못한 나무
정성수
숲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이 된다는 것을
작은 나무 몇이 서는
아름드리나무 혼자서는
절대
숲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숲 밖에서는 몰랐다.
동구에 서서 한철 동안
푸른 그늘 넓게 펴도
천년을 풍광의 배경이 된다할지라도
혼자 서 있는 나무는
숲이라 불러주지 않는다. 그저
한 그루의 나무일 뿐.
숲이 되지 못한 나무
가슴에 귀를 대고
속울음소리 듣고서 숲을 생각했다.
숲이 그리워
숲이 되고 싶어 울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그때서야 알았다.
☆★☆★☆★☆★☆★☆★☆★☆★☆★☆★☆★☆★
《12》
우주의 책
정성수
지구 위에서 날마다
우주의 책을 펼치지
넘기고 넘겨도 다시 남고
읽고 읽어도 다시 처음
한평생 나는
무엇을 읽었는가
마침내 나는
보이지 않는 신의 그림자를 보았는가
내 앞에 놓인 책 한 권 다 읽지 못하고
책 읽는 나조차 다 읽어내지 못하고
어리석은 한 생애
끝없는 독서
저녁마다 나는 별빛 아래 쓰러지고
새벽마다 나는 햇살 아래 부활하지.
☆★☆★☆★☆★☆★☆★☆★☆★☆★☆★☆★☆★
《13》
저녁 무렵
정성수
사랑에 데어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뜨거운지
사랑의 물집이 터져 뼛속 깊이 스며들 때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그 두려움을 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별에게 맞아봐라.
손바닥이 얼마나 얼얼한지
회초리 끝이 얼마나 캄캄한지.
사랑에 무릎 꿇고 벌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오늘도 돌아서서 가는
그 여자의 뒤꿈치를 핥다가
하루해가 갔다.
입안 가득 고인
소금기
찝찔한 저녁 무렵.
☆★☆★☆★☆★☆★☆★☆★☆★☆★☆★☆★☆★
《14》
탄생
정성수
태어나는 일은
못내 서러운 것이라고
너는 이 저녁
산부인과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이토록 우는 것이냐
아직 열리지도 않은
네 속눈썹 속에
차가운 시신이 보여
슬프디 슬픈 비명을 울리는 것이냐
울음소리 엿듣는 하늘은 알리라
풀어헤친 네 울음자락이
어디로 펄럭이며 가는 것인가를
누가 너를 나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보내 주었는가를
왜 너는 이 땅의 아이로
내려섰는가를
울려라, 아가야
네 못 다한 울음의 줄을 퉁겨
숨어있는 비밀이 다하여
네 번쩍이는 울음이 그칠 때
세상은 다시 태어나
너의 무릎 앞에서 옷을 벗고
그러면 너는 알리라
우리에게도 이 바람 부는 땅
울지 않는 순간이 있음을
우리도 언 뺨을 비비고
끝내 사랑할 수 있음을
죽음도 우리는
미워하지 않음을.
☆★☆★☆★☆★☆★☆★☆★☆★☆★☆★☆★☆★
《15》
황홀한 구린내
정성수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힘껏 밀어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고통스럽게
세상에 나온 것
그것은
한 편의 시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은 변비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황금빛 똥이 아니더라도
자주 자주 밀어낼 수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그릇의 밥을 먹고
똥통을 깔고 앉아서 코를 벌름거리며 시똥을 싸리라.
한 편의 시가 풍기는
이 황홀한 구린내.
☆★☆★☆★☆★☆★☆★☆★☆★☆★☆★☆★☆★
☆★☆★☆★☆★☆★☆★☆★☆★☆★☆★☆★☆★
《1》
1월의 시
정성수
친구여
최초의 새해가 왔다.
이제 날 저무는 주점에 앉아
쓸쓸한 추억을 슬퍼하지 말자.
잊을 수 없으므로 잊기로 하자.
이미 죽었다.
저 설레이던 우리들의 젊은 날
한마디 유언도 없이
시간 너머로 사라졌다.
스스로 거역할 수 없었던
돌풍과 해일의 시절
소리 없는 통곡과
죽음 앞에서도 식을 줄 모르던 사랑과
눈보라 속에서 더욱 뜨거웠던 영혼들
지혜가 오히려 부끄러웠던 시대는 갔다.
친구여, 새벽이다
우리가 갈 길은 멀지 않다.
그믐날이 오면 별이 뜨리니
술잔이 쓰러진 주점을 빠져나와
추억의 무덤 위에 흰 국화꽃을 던지고
너와 나의 푸른 눈빛으로
이제 막 우주의 문을 열기 시작한
저 하늘을 보자
지치지 않는 그 손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야 할 또 다른 길 위에
오늘도 어제처럼
투명한 햇빛은 눈부시리니.
☆★☆★☆★☆★☆★☆★☆★☆★☆★☆★☆★☆★
《2》
2월의 시
정성수
자, 2월이 왔는데
생각에 잠긴 이마 위로
다시 봄날의 햇살은 내려왔는데
귓불 에워싸던 겨울 바람소리 떨치고 일어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저 지평선 끝자락까지 파도치는 초록색을 위해
창고 속에 숨어있는 수줍은 씨앗 주머니 몇 개
찾아낼 것인가
녹슨 삽과 괭이와 낫을
손질할 것인가
지구 밖으로 흘러내리는 개울물 퍼내어
어두워지는 눈을 씻을 것인가
세상 소문에 때묻은 귓바퀴를
두어 번 헹궈낼 것인가
상처뿐인 손을
씻을 것인가
저 광막한 들판으로 나아가
가장 외로운 투사가 될 것인가
바보가 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
《3》
가을 엽서
정성수
가을이다 소녀야
먼 어느 날
네가 나를 이 땅에 낳았을 때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이 깊어
이 가을에도 나는 네 곁을 서성이며
하늘에 매달린 사과알을 두 손에 받쳐들고
너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열리는
탄생과 죽음의 몸부림을 보느니
소녀야
너는 오래오래 늙지도 말고
그 자리에 그렇게 하늘 이고 서서
들녘의 바람을 재우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낳도록 하렴.
☆★☆★☆★☆★☆★☆★☆★☆★☆★☆★☆★☆★
《4》
가을엔 빈손으로
정성수
가을엔 돌아가야지
여름날의 장작불을 바닷가에 묻고
지난봄에 심은 이름 없는 씨앗 곁으로
다시 떠나야지
흙바람 속 달리며 눈멀고 귀 먹어
오래오래 잊었었구나
겨울 밤 문풍지를 흔들던 몸부림도
새벽이면 꿈 밖으로 흩어지던
날개옷의 깃털들도
아아, 뜨겁게 자랐을까
저 어두운 땅 속 깊이 뿌리 내리고
보이지 않는 잎사귀 펼쳐 들고
한 뼘 더 해 가까이 줄기를 키우고
가을 사람들이
시린 눈으로 바라보는 하늘 아래
작은 기도만한 과일 한 알
지나온 길이 오지 않는 그리움이듯
돌아오는 길 또한
얼마나 설레는 것이랴
숨은 기억마다 눈을 뜨면서
이 가을에 비어있는 손
선악과에 닿는 이브의 손길 마냥
고요히 떨고 있구나.
☆★☆★☆★☆★☆★☆★☆★☆★☆★☆★☆★☆★
《5》
고독한 신의 그림자
정성수
은하계 너머
또 다른 은하계 너머
다시 먼 은하계 너머
터무니없이 아득하고
더욱 아득한
끝없이
끝이 없는 우주의
외딴섬 같은 핵의 자궁으로부터
신의 손짓 내려와
내 숨소리 곁에서 출렁인다
어깨가 많이 굽은
깡마른 독수리처럼 앙상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오래오래 웅크리고 앉아있는
저 고독한
신의 그림자 하나.
☆★☆★☆★☆★☆★☆★☆★☆★☆★☆★☆★☆★
《6》
고해苦海
정성수
괴롭다고 가슴을 치는 꽃이 어디 있으며
울고싶다고 날개를 접는 나비가 어디 있으랴
인간들만이 괴롭다고 한숨을 쉬고
울고싶다며 울 데를 찾아 나선다
세상일이란 괴롭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괴로운 것
울고싶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눈물나는 것
괴롭지 않은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
울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도
불쌍한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가부좌를 틀고 계시는 부처님도
죄 많은 중생들을 위하여 풍경소리를 내고 있다
술잔을 앞에 놓고 두 눈을 감고 있는 것도
다 괴로움 때문이고
한 잔 술에 위로를 받는 것도
다 울고 싶기 때문이다
쇠붙이도 담금질을 참아내야 비로소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괴로워서 사람이다 울고 싶어서 인간이다
☆★☆★☆★☆★☆★☆★☆★☆★☆★☆★☆★☆★
《7》
내 인생의 힘
정성수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는
금송아지가 있다고 뻥을 쳤습니다.
군대에 가서는
사단장이 친구 아버지라고
포를 틀었습니다.
뻥을 치면서
포를 틀면서
세월을 축냈습니다.
돌아보니
삶의 팔 할이 허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힘이었습니다.
☆★☆★☆★☆★☆★☆★☆★☆★☆★☆★☆★☆★
《8》
다시 새해
정성수
보신각 종소리
서른세 번 울리고
축복의 나라에 내려선 해방동이
어느새 부끄러운 애비가 되고
캄캄한 떠돌이별 저쪽으로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한 해
꽃잎처럼 산산히 흩어져 버리고
다시 낯선 새해
깊은 밤 길을 달려 떠오릅니다
우리가 태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보내지 않아도 세월은 스스로
어디론가 저 홀로 깊어 가지만
사라져간 뒷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그리운 것
가령 그것이
떨리는 우리의 넋을 잠시 해체시킨
선지피 묻은 손짓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힘은
희망이라는 이름이
해진 주머니 속에 늘 감춰져 있다는 것
저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달려오는
새해의 가쁜 숨소리에 귓바퀴 열면
아득히 잊어버린 심장이
다시 살아 뛰는 소리
가느다란 실핏줄 속마다
붉은 피톨 부딪치는 소리
아내는 누워서
천장의 희미한 꽃무늬를 헤아리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고
어린 하영이는
제 어미의 팔뚝 위에
무심한 하루를 내려놓고
난쟁이 나라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됩니다
한울님
어리석은 사나이는 어리석은 죄로
어리석게 사오나
이 아기의 애비다운 애비이게 하소서
이 젊은 여인의 지아비다운
지아비이게 하소서
지난 해처럼 슬픔은 자주 잊게 하시고
기쁨은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소서.
☆★☆★☆★☆★☆★☆★☆★☆★☆★☆★☆★☆★
《9》
세월
정성수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잡히지 않는 것은 안개뿐이 아니다
골백번도 더
맹세했던 그 사람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등을 보인다.
떠나버린 사랑은
핥으면 핥을수록 쓰디쓰고
지나 온 세월은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어지럽다.
내 마음은 평생을 그 자리인데
네 몸은 한순간에 멀리 가 있다.
☆★☆★☆★☆★☆★☆★☆★☆★☆★☆★☆★☆★
《10》
소리
정성수
아내가 돌리는 전자동 세탁기 소리는
몇 시간 낮잠을 푹 자도 된다는
아내가 좋아하는 뽕짝 같은
자장가.
그 옛날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엄마가 네 옆에 있으니
온밤
안심하고 꿈을 꿔도 좋다는
엄마가 내게 보내는
수신호.
세상의 어떤 소리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가끔은 마음속
덧난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
《11》
숲이 되지 못한 나무
정성수
숲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이 된다는 것을
작은 나무 몇이 서는
아름드리나무 혼자서는
절대
숲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숲 밖에서는 몰랐다.
동구에 서서 한철 동안
푸른 그늘 넓게 펴도
천년을 풍광의 배경이 된다할지라도
혼자 서 있는 나무는
숲이라 불러주지 않는다. 그저
한 그루의 나무일 뿐.
숲이 되지 못한 나무
가슴에 귀를 대고
속울음소리 듣고서 숲을 생각했다.
숲이 그리워
숲이 되고 싶어 울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그때서야 알았다.
☆★☆★☆★☆★☆★☆★☆★☆★☆★☆★☆★☆★
《12》
우주의 책
정성수
지구 위에서 날마다
우주의 책을 펼치지
넘기고 넘겨도 다시 남고
읽고 읽어도 다시 처음
한평생 나는
무엇을 읽었는가
마침내 나는
보이지 않는 신의 그림자를 보았는가
내 앞에 놓인 책 한 권 다 읽지 못하고
책 읽는 나조차 다 읽어내지 못하고
어리석은 한 생애
끝없는 독서
저녁마다 나는 별빛 아래 쓰러지고
새벽마다 나는 햇살 아래 부활하지.
☆★☆★☆★☆★☆★☆★☆★☆★☆★☆★☆★☆★
《13》
저녁 무렵
정성수
사랑에 데어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뜨거운지
사랑의 물집이 터져 뼛속 깊이 스며들 때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그 두려움을 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별에게 맞아봐라.
손바닥이 얼마나 얼얼한지
회초리 끝이 얼마나 캄캄한지.
사랑에 무릎 꿇고 벌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오늘도 돌아서서 가는
그 여자의 뒤꿈치를 핥다가
하루해가 갔다.
입안 가득 고인
소금기
찝찔한 저녁 무렵.
☆★☆★☆★☆★☆★☆★☆★☆★☆★☆★☆★☆★
《14》
탄생
정성수
태어나는 일은
못내 서러운 것이라고
너는 이 저녁
산부인과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이토록 우는 것이냐
아직 열리지도 않은
네 속눈썹 속에
차가운 시신이 보여
슬프디 슬픈 비명을 울리는 것이냐
울음소리 엿듣는 하늘은 알리라
풀어헤친 네 울음자락이
어디로 펄럭이며 가는 것인가를
누가 너를 나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보내 주었는가를
왜 너는 이 땅의 아이로
내려섰는가를
울려라, 아가야
네 못 다한 울음의 줄을 퉁겨
숨어있는 비밀이 다하여
네 번쩍이는 울음이 그칠 때
세상은 다시 태어나
너의 무릎 앞에서 옷을 벗고
그러면 너는 알리라
우리에게도 이 바람 부는 땅
울지 않는 순간이 있음을
우리도 언 뺨을 비비고
끝내 사랑할 수 있음을
죽음도 우리는
미워하지 않음을.
☆★☆★☆★☆★☆★☆★☆★☆★☆★☆★☆★☆★
《15》
황홀한 구린내
정성수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힘껏 밀어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고통스럽게
세상에 나온 것
그것은
한 편의 시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은 변비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황금빛 똥이 아니더라도
자주 자주 밀어낼 수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그릇의 밥을 먹고
똥통을 깔고 앉아서 코를 벌름거리며 시똥을 싸리라.
한 편의 시가 풍기는
이 황홀한 구린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