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슬픈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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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슬픈 잔치

유한나 0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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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슬픈 잔치

강문숙

-늦잠에 빠진 꼬마야, 어서 외할머니랑 손잡고 이모 대학 졸업식에 가자.
-서둘러라 얘야, 입학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예쁜 옷을 사러 가야지.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대신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 오겠어요.
-보고 싶다 친구야, 학원에서 만나자 나 지금 가고 있어.
-잠깐만 기다리세요, 빨리 가서 엄마랑 같이 밥 먹고 싶어요.
-노래 교실에 가면 스트레스가 확 풀려, 오늘은 박자를 놓치지 말아야지.
-오늘 아침 산행은 정말 좋았어, 길이 물렁물렁해지는 걸 보니 곧 봄이 오겠구나.

유난스레 바쁘고 들뜬 이월 어느 아침,
봄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먼저 와 있어, 모든 것이 설레고 행복했다.
쿵쿵, 가파른 지하철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활기찬 발소리,
시간을 옮겨 놓을 듯 순식간에 다른 네거리에 가 닿는 전동차의 굉음.
못다 채운 잠에 겨워 눈을 감고 있던 나른한 사람들,
어제 읽다 만 책장을 펼쳐놓고 활자를 쫓고 있던 그의 검은 테 안경.
아침부터 무슨 일이 그렇게도 즐거운지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깻잎머리 소녀들.
분홍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차장으로 비춰보며 미소짓는 그녀들.

갑자기 싸늘한 공기가 귓볼을 아프게 때린다.
어디선가 모난 돌이 날아들어 유리창은 일시에 쏟아져 내린다.
검은 유령처럼 캄캄한 어둠이 그들을 덮친다. 지상에선
파랗게 질리며, 가로수 빈 나뭇가지가 우두둑, 꺾인다.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에 휩싸이며 계단이 사라지고,
땅 속 깊이 깊이 뜨거운 불길로 뒤덮인다.
시간이 정지되고, 굳게 닫힌 문 속에서 소리들이 뒤엉킨다.
그의 손에서 읽다만 책이 툭! 떨어진다.
소녀들은 이야기와 함께 화염 속으로 녹아 흐르고,
그녀의 분홍립스틱이, 장밋빛 인생이 뭉개진다.

오, 하나님! 하나님!&nbsp;&nbsp;
순식간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의 그림자마저 사라졌다.
신의 슬픈 눈동자만 오래오래 남아 저녁 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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