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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꽃 2 3785
직접 등록을 해야 되는데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시집<하얀 그리움>-85편


노을이 아름다운 마을

박금숙


청정한 남해 바다를
한 입 베어 물고
멸치 떼처럼 오밀조밀
낮게 엎드린 마을이
노을 속 그물망에 걸려있다

고래를 삼켰거나
말랑말랑한 오징어를 씹고 있었을
지붕들 일제히 황금 비늘을 파닥인다

여인의 알몸 같은 갈매기 살빛에도
발그레한 물이 오르고
갯바위는 금방 산란이라도 할 것처럼
달아오른 낯빛이다

어선들 한 척 두 척
입항이 시작되고
절정에 다다른 핏빛 광선,
마을에서 잘 나간다는 횟집을
쓰윽 썰어낸다

검게 그을린 어부의 얼굴에
둥근 웃음이 번진다
싱싱한 노을 속에 매 놓은
간이 선착장 고깃배들
내일의 줄이 팽팽하다.




꿈꾸는 나비

박금숙


보기도 흉한 유충으로
어둠의 탯줄을 자르기 전까지는
단지 눈을 뜨기 위한
기다림의 침묵이었을
붉은 점 모시나비

처음 날개를 달고
그 가파른 날개도
아름다움임을 깨닫는다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던
눈은 중심을 잃고
온통 날개로만
땅에서 공중으로
꿈을 흔들기 시작한다

푸른 창공을 날기만 하면
세상은 눈 아래 있다고
스스로를 감탄하며
당당하게
작두 날 같은 햇살
타고 오른다
 
흡! 어지러워 모로 꺾인다
풀섶이 흔들린다
추락해본 후에야
비로소 바로 보이는 눈.





이별 엽서

박금숙


가을바람이
담장 모퉁이를 지날 무렵
모서리가 다 닳은
낙엽 한 장
편지함에 꽂혀있었다

지난밤 온 산이
불덩이처럼 밝았던 것은
내내 이별에 대한 가슴앓이로
신열이 올랐던 거라고

아아, 몰랐었다
이별이란
한쪽 가슴을 다 도려내고도
뼈 시린 겨울 길목에
맨발로
홀로서야 하는 일임을.




이층방의 전망

박금숙


물빛 하늘이 물구나무를 섰다
단감나무 과수원에 부서진 햇살
잎새마다 촘촘히 스며
속살을 태우느라 부산하다

허공을 선회하던 고추잠자리 한 쌍이
서투른 원을 그리며 짝을 좇는데,
가로수를 등지고 서 있는 아이 하나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하품을 입에 문 채
빈 과자봉지만 떨군다

담쟁이덩굴 창틀로 기어올라
낮은 실바람 지날 때마다
사르락 사르락
어릴 적 신랑각시의
수줍은 목소리가 묻어오고

여문 해바라기 고개 너머로
햇살무늬 낙엽 한 잎,
하! 꼭대기만 장식한 은행나무는 왕관
전망 좋은 방안의 나는 여왕이어라.



나무 한 그루

박금숙


가파른 언덕길에
쓰러질 듯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

아픈 기억 하나
차마 떨칠 수 없었던지
툭, 불거져
혹처럼 휘어 굳었다

시선은 언제나
먼 산꼭대기에 걸어둔 채
바람이 이따금씩
목덜미를 흔들어도
묵묵히 우수憂愁에 젖어있다

언제부턴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채이기 시작한 둥치

생의 잔해 같은 딱정이가
뚝뚝 떨어져 나가도
아릿, 짓물러야 할
상처조차 무디다

흙 위로 훤히 드러난
헐거운 생 뿌리, 하염없이
함께 뒤엉킬 누군가가 그리워
커다란 바윗돌 하나
힘껏 끌어당기고 있었다.




섬마을 유채꽃

박금숙


이른 봄부터
섬마을은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마을 어귀부터
언덕 비탈진 곳까지
질서 정연하게 키를 맞추고

파도가 한 번 발을 구르고 나면
노란 유채꽃도
일제히 물결을 이룬다
갯바람의 비린 식성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떼 지어 몰려온 갈매기의 함성에
의기양양 꽃 대궁을 세우면
마늘밭 숨차게 날아온 나비가
호기를 누리는 순간이다
초유 같은 누런 젖물을 빨아
금세 꽁무니가 부르다

꽃 무덤을 파고 눌러앉은 마을은
어느새 신방이 되어있다
허리가 휘어진 돌담 아래 유채밭이
혼사를 앞둔 처녀의 몫 이란다
어느 신부의 화관이 저리 고울까
지금 섬마을은
유채꽃 축제가 한창이다.






어떤 과수원집 풍경

박금숙


하얀 낮달이
주인집 옥상 물탱크 위에서
근심어린 눈빛으로
보초를 서고 있다

눈치 없는 까치들
아직 맛도 덜 든
단감나무 잎 사이를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희희낙락대는데

탱자나무 울타리는
언제부터 제 구실을 잃었는지
땅을 파헤치고 들이닥친
날선 포크레인 앞에
저항 한 번 못해본다

길 넓힌다고
흙먼지 거뭇거뭇
반도막만 남은 과수원
그것도 다행인 양
옹알옹알 붙은 풋감들
천연스레 배꼽을 내민다

올 가을 수확이나 되려나
농가 근황 궁금하던 바람
허리 잘룩,
더운 눈 치켜뜨더니
진창 된 농토 볼썽사납다
혀 끌끌 차며 지나간다.




비 맞은 의자

박금숙


걷다가 지치면
너 나 없이 한 번쯤
등 붙였을 긴 의자 하나
나무 밑에서 굵은 빗방울을
뚝뚝 맞고 있다

젖은 제 무게에
푹 꺼지고 싶기도 하련만
세상일이란 마음대로
주저앉기도 쉽지 않아
짓무른 땅에도
네 발 단단히 지탱하고 서 있다

누군가 우산을 받쳐들고
앉을 듯도 하여
다시 내다보면
구정물 튈세라 흘끔흘끔
비켜가는 차가운 발걸음뿐

햇볕에 보송보송 마르면
다투어 차지할 자리에
물총까지 쏘고 달아나는
자동차 안의 의자들은
제법 의기양양
경적조차 요란하다.








오후의 권태

박금숙


태양은 한복판에 머물러있고
나른한 풍경 몇 조각이
좁은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하릴없이 뒹굴다 포착된 풍경이란
매양 쓰다만 편지거나
미완성 수채화 같은 것

반짝, 부풀어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야 할 것들이
침묵으로 정지해버린 시간들

도대체 이 못쓰게 된 시간들을
얼마나 깔고 누워 지내온 것일까

기한조차 불분명한 의식들이
습관처럼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흐린 날의 단상

박금숙


무심히 흐르다
산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멈춰버린 구름 한 조각

그 흐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쩌면 사는 일이
물동이 하나
이고 있는 일이라고

한바탕 쏟아버린대서
후련해질 것도 아닌데
차라리 넘쳐 흘러버리기를

나는 망부석처럼 서서
그것이 어떤 그리움이나
모종의 미련 때문이라고
늦은 오후가 다 되도록
한사코 우겼으나

다시 올려다본 하늘은
이도 저도 아닌
허공을 퍼 올리는
삶의 두레박줄이
매달려 있는 것뿐이란다.








가을 예감

 박금숙


가을이 오려나보네
온몸 서걱서걱
갈꽃 같은 그대 그리운 걸 보니

여름내 헛가지 마구 자라더니
나무들 속살 뜸 드는 걸 보니
과일 익듯 사랑도 익으려나보네

먹구름 훌훌 멀어지고
하늘빛 파랗게 시려오는 걸 보니
한가을 내내
약도 없는 속병을 앓으려나보네

가을 깊어지면
풀벌레 울음에 잠귀 밝아지듯
그대도 내 맘 알거나.
















마음을 비우고 싶은 날

박금숙


등골이 녹녹하도록
햇살 받으며
텅 빈 호숫가에 앉아
물밑에 고요히 흐르는
구름이나 보고 싶네

말초신경 건드리지 않는
피라미 한 마리
가만히 물풀 속에 숨어들면
내 의식의 부유물들
죄다 가라앉히고
맑은 영혼 하나 건지고 싶네

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물도록
그렇게 정물처럼 앉아 있다가
땅거미 짙어오면
내 허물 같은 그림자
오롯이 벗어두고
막 어둠을 뚫고 나온 
의문 없는 별 하나 만나고 싶네.












갈대꽃

박금숙


산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다만
강물을 바라보다가
산등성까지 하얗게
물결처럼 번져버린 그리움

목말라,
부를 수조차 없는 이름들
수두룩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 
눈이 부시도록 아찔한
공복의 허기

바람의 빈 울음은
모질게도 목에 걸려오고
산불처럼 번지는 노을
내 야윈 몸을 벌겋게 태우며
유유히 산을 넘고 있었다.













잎새 바람

박금숙


바람이 잎새를 흔드는 것은
저도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아무 일 없듯이
평온해보일 때도 있지만
숨죽여 좁은 틈새까지
제 흔적을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저보다 강한 것들은
쓰러뜨리는 법이 없지만
열매가 되지 못한 가벼운 것들은
더 많이 흔들린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때때로
삶의 잡념 같은 부스러기들을
말끔히 털어주다가

잎새들 길 떠나는 가을날에는
저도 짐짓 몸을 낮추어
동반된 생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낙엽의 뒤를 따르는 것이리라.








겨울 江

박금숙


엄동으로 돌아앉은
산을 보고
강은 말이 없다
침묵을 넘어선
고혹적인 적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급류하던 물살
체한 듯 뒤틀린 것은

휘돌아 굽이칠 수 없어
속으로 속으로만 울기까지
끝내 얼지 않으려고
갈래갈래 수많은
생각의 길을 냈으련만

쪽빛 희망마저
저문 그림자 드리워져
삭풍에 억장 무너진 강심
위안처럼
하얀 달빛을 품어 안는다.












3월

박금숙


거친 눈발이 몰아치거나
느닷없는 천둥이 치거나
폭우가 쏟아지거나 하는 것은
참을성 없는 계절의
상투적인 난폭운전이다

3월은
은근히 다림질한 햇살이
연둣빛 새순 보듬어주고
벚나무 젖빛 눈망울
가지를 뚫고 나와
연한 살내 풍기는
부드러움이다

꽃샘추위 시샘을 부려도
서둘러 앞지르지 않고
먼 길 돌아온
도랑물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일 줄 아는
너그러움이다

3월은
가을에 떠난 사람
다시 돌아와
추웠던 이야기 녹이며
씨앗 한 줌 나누는
포근함이다

























그대에게 가는 길

박금숙


새벽 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갑니다
굳이 반겨주지 않아도
그대 등 뒤에 비춰진
햇살 한 자락
볼 수 있으면 됩니다

산 같고 강물 같은 그대
말없이 멀어졌던 들녘에는
희뿌연 안개가
어젯밤 뒤척이던
빗장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겹겹이 쌓인 산 따라
세월만큼 자란 나무들,
이제 보내지 못해
무수히 매달고 있던 편지들을
곱게 물들여 어디론가
전송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기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비켜난 철로 밖으로
들꽃처럼 피고 지던 그리움이
한 움큼씩 다가옵니다

이 길 돌아올 즈음이면
저 안개 속에 숨어있는
알 수 없는 풍경들도
그리움 몇 조각 덜어낸
밝고 투명한 길을 열어주겠지요?





이슬 같은 사랑

박금숙


그대 앞에 티 없이 맑은
이슬 같은 사랑이고 싶습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날 때
찬란한 빛으로 답할 줄 알고
그대 흘린 눈물인양 비가 내리면
함께 뒤엉겨 슬퍼할 줄 아는
이슬 같은 사랑이고 싶습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하루만큼의 소망으로
구태여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목마르지 않는
이슬 같은 사랑이고 싶습니다

밤마다 풀벌레 음률에
촉촉이 귀를 적시고
부끄럽지 않은 나신으로
데구르르, 굴러도 보는
이슬 같은 사랑이고 싶습니다

바람이 흔들어 깨우는 아침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영롱한 무지개 꿈 하나
살포시 안겨줄 그런
이슬 같은 사랑이고 싶습니다







지지 않는 별

박금숙


그대여
그 먼 나라에 붙박여
밤마다 누구를 위한
등불을 밝히는가

손 내밀 듯 다가서다
찬이슬 머금고
유성처럼 사라지더니

이국땅 동화 속 아이 같은
샛별 하나 거느리고
마주한 슬픈 인연이여

내가 매일 밤
높은 담을 올려다본 것은
그대가 아니라
내 안에 지지 않는
별을 보기 위해서라오.














오월 편지

박금숙


초록빛 상큼한 나뭇잎 한 장
손바닥에 살짝 뜸 들여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움처럼 아련히 박힌
잎 무늬 따라
톡톡 튀는 햇빛으로
반짝이는 글자 새겨 넣고
마알간 하늘에
은근히 우려낸 들꽃 향도
한 움큼 퍼 담아 봅니다

그대와 걷던 길엔
참 많은 추억들이 자라고 있군요

어깨 너머 미풍이
보고 싶다 추신을 부추기네요
어쩔까 음...
망설이다가
민들레 꽃씨 몇 개 후 불어
수줍은 점만 콕콕 찍어 넣습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햇빛과 풀잎의 사랑

박금숙


한낱 마른 풀잎으로
미동조차 서투르기만 한
부석부석한 영혼에
한줄기 빛을 주신이여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구김살 없는 화사함으로
그늘진 구석구석을
반듯하게 빗질해주시고
살갑게 보듬어주신 그대
나, 죽어도 잊지 못 합니다

한때, 너무 눈부셔
어눌한 육신 주체 못하고
눈 감은 적 있지만 하루하루
푸르게 짙어가는 그리움에
나, 죽죽 울기도 했습니다

그대 가는 계절 따라
내 빛깔 또한 퇴색되는 것은
혹여, 찬바람에
그 영롱한 빛 하얗게 사위거든
나, 검불 되어 그대 위한
혼불을 놓으려함입니다

그리하여 한 줌 재로
세상 어딘가에 뿌려졌다가
또 길지 않은 생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나, 기꺼이 그대 햇살 아래
한 잎 풀이되려함입니다.




차창 밖으로 멀어진 너

박금숙


차에 오를 때부터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멀어지기 힘든
지독한 멀미를 하고 있었다

말없이 흔드는 손
급제동이라도 걸리기를,
안전벨트 안으로
줄줄이 모자랐던
시간의 고리를 당겨보지만

붙들 수 없는 정지선에서
속수무책 바라만 보는 방심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움에 지쳐야 할
기한이라도 물어둘 걸

끝내 빈 가슴에 비는 퍼붓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모르는 사람들처럼
차창을 스쳐 멀어지고 만다.











밤비에 젖다

박금숙


천지간
반짝이는 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비가 내린다

잠시의 휴지기도 없이
퍼 부어도 퍼 부어도
고일 수 없는
시멘트 바닥인 것을
나는 또
내 안에 웅덩이를 파고 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부유물 속에
종잇장처럼 둥둥 떠다니는
그.리.움

밤은
질척이면 질척이는 대로
잠들라 하는데
유독 나만 세상의 규칙을
어기고 있는 것일까?












시들지 않는 그리움

박금숙


꽃처럼 살라 하셨나요.
바람 분다 마음 졸이지 말며
고개 돌려 먼 길 바라보지도 말고
그저 화사한 꽃으로 서서
의연하게 살라 하셨나요

그리 하려고 죽을 힘 다했지요
어느 산기슭
나리꽃에 내려앉은
밤이슬만큼이나 아득한 그대를
차마 내 안에
가둘 수는 없었으니까요

허나,
바람 한 점 없는 들에서도
꽃잎은 흔들리더이다
꽃잎이 지고 계절 바뀌어도
그대 향한 그리움의 향기는
속수무책 짙어만 가더이다.

끝내 스러진 풀잎에 누워
한 잎 한 잎 도려내는
이 아픔은 어찌해야 합니까
시들지 못해 연기처럼 타고 있는
지독한 이 그리움의 향기를... 














그대는 알까

박금숙


까마득한 골목길
시린 발로 달려와
불 꺼진 창 수없이 노크하는
바람의 심정을
그대는 알까

돌아서 돌아서
다시 제자리
별빛마저 지쳐 울먹이다
새벽 비로 눈물 훔치는
서글픈 심정을
그대는 알까

삼킨 빗방울
펑펑 토해내다
굳게 잠긴 창틈에
목을 맬 수도 있다는 것을
정녕 그대는 알까. 














기다림

박금숙


땅거미 내리면
밤은 금방인데,
금방인데
속 타는 노을만
동동 붉어지고

수상한 바람결에
멈칫 돌아보면
어슴푸레 일렁이는
달맞이꽃 잔영인 걸

목 메인 꽃잎들
하나 둘 떨어져
끝내
붙박이 별 하나
질러놓고, 질러놓고.
















그리움의 길

박금숙


그리움은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바람처럼 풀잎을 쓰러뜨리고
밤하늘의 별도 허물어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을 낸다

늘 혼자서 걷는 쓸쓸한 길이기에
고개 숙인 꽃봉오리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맥이 파랗게 접힌 나뭇잎도
그 의미가 깊다

때로는 솔잎 푸른 오솔길이
막연한 슬픔의 통로가 되고
때로는 바퀴만 굴러다니는 아스팔트길이
열꽃 같은 희망으로 차오르기도 한다

그리움으로 달려가는 길은
가슴에 숨 가쁜 초침 하나
달고 가는 일이라서
닿기만 하면 멈춰버릴 것 같은,
그래서 더 이상의 길을
막아버려야 할 막다른 길이다.








이 가을 그리운 이를 위하여

박금숙


샛노란 국화꽃 한 움큼 따서
가을볕에 잘 말려둬야지
첫눈 사락사락 내리는 날
그대 약속처럼 오시면
마주앉은 자리에
향 짙은 찻잔을 내어야지

깊은 숲 속 가장 곱게 물든
단풍잎 한 장 골라서
책갈피에 살며시 끼워둬야지
그간 어찌 지냈느냐고 물으시면
그립다 못해
검붉게 멍들었노라고 말해야지

마음에 장작불을 지펴서
벽난로처럼 가슴을 데워둬야지
옷 벗은 겨울나무마냥
추위에 몸살 앓는 그대
한겨울 내내 머물 수 있도록
포근히 감싸줘야지.











울며 나는 새

박금숙


먹장구름 뒤엉킨
마음마저 울적한 날
꺼이꺼이 울며 날아
어디로 가는가

떠나버린 임일랑
찾지도 마라
작정하고 떠난 이가
마음인들 있겠느냐

짝 잃은 새 되어
밤낮없이 헤매 돌다
용케 마주친 반가움도
말짱 남이더라

너도 이제 그만
지친 날개 접고
미련 또한 버리거라

어쩌지 못해 또
오던 길 돌아보는
내 마음 같은 새여.










사랑의 무늬

박금숙


만약,
사랑의 무늬를 그린다면
곱게 짠 비단 한 필에
무채색 투명한 이슬 한 방울
땀땀이 수놓겠어요

물에 비추면 물결무늬요
햇빛에 비추면 햇살무늬

그 비단
한 올 한 올 풀어내어
씨실 날실에 맺힌
제사製絲의 마음 보이시거든
그것이
제 사랑의 무늬인 줄 아세요.


















빗물 같은 사람

박금숙


난생 처음
빗물 같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온몸에 고인 정 때문에
마음이 축축이 젖어 버렸습니다

늘 온화한 눈으로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아주 오래 곁에 두었던 사람처럼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우산을 내던지고 비를 맞았습니다
어디선가 나처럼 헤매이고 있을
빗물 같은 그 사람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파옵니다

전화를 할까 망서려보지만
행여 짐이 될까 돌아서고 맙니다
흐르는 물보다 고인 물이
더 빨리 마를 거라며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훗날 먼저 하늘나라에 가면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만 참자했습니다
큰 우산 하나면 족할 것 같은 그 사람을
이제는 영영 기다려야만 합니다.






허망한 사랑

박금숙


맹세는 믿지 못할
말의 상처일 뿐이라 했거늘
무엇을 믿고
너와 나
미치도록 소용돌이쳤던가

불씨 꺼야 할 눈물마저
다 쏟아 붓고
너로 하건 나로 하건
아플 만큼 아팠는데

바람 불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약속된 계절처럼
한 잎 한 잎
털어내야 하는가

한 줌 재도 안 남을
허망한 사랑이여,
그래도 너밖에 없다는
말 한 마디
길목 길목 눈물겹다.











하얀 그리움

박금숙


겨울 뜨락에 깃든
어린 새의 날갯짓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그대는 아시는지요

눈 덮인 벌판을
갈래야 갈 수 없고
부를래야 부를 수 없는
통제된 슬픔입니다

인연의 알껍데기
깨지나 말 것을

어쩌다
둥글디둥근 세상
알록달록 한 번 굴려보자고
부화를 재촉하듯
한 줄기 빛을 보고야 말아

시린 눈마저 멀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목 언저리에
하얗디하얀 그리움만
켜켜이 쌓입니다.





























오월의 길

박금숙


보리빛 총총한 아침 길을 달린다
잠에서 덜 깬 어린 풀들이
구르는 바퀴에 덤벼들었지만
페달은 정확히 길을 밟고 달린다

물안개 뽀얗게 핀 강줄기 지나
플라타너스 나무 몇 그루
은빛 출렁이는 언덕 아래에
꽃시계 엮었던 추억 한 다발 내려놓고
햇살 낀 자갈 헤치며 비탈길을 오른다

산을 보듬고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펼쳐진 꽃 속의 꽃들
그 속에도 길이 보여
땀구멍 같은 무수한 틈으로
실 빛 바람이 폭을 넓히며 지나간다

숲은 숲대로 은밀한 통로가 나 있다
양 옆으로 치솟은 수목들이
듬성듬성 가지를 엮어
짙푸른 녹물을 걸러내고
짝짓던 산새들 저마다 퍼렇게 멍든
꽁지 하나씩 떨구며 달아난다

안개 올올히 풀어지자
길 위로 줄기찬 햇살 쏟아진다.






우리들의 작은 풍경

박금숙


잘 익은 사과 향처럼
쪽빛 햇살 번져오는 아침
말갛게 비워낸 눈빛만으로
갖가지 색채가 그려지는
우리들의 작은 풍경 속에는

마주앉은 차 한 잔에
꽃이 없어도 향기가 있고
창밖 세상 꽉 막혀
원경을 볼 수 없어도
사계절 변함없는
사랑의 숲이 자랍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아
빈 공간마다 가벼운 꿈들
묵은 먼지로 쌓였지만
낡은 물건 하나하나가
눈높이의 풍경이 되는
지금 이대로가 우리들의
작은 파라다이스입니다.











아침 창가에서

박금숙


하루살이가 숨을 거둔
방충망 틈새에
햇살이 몸을 풀어
무수한 산란을 하고 있다

창문을 열어주려다
자세히 보니 이런,
꿈틀거리는 것은 빛이 아니라
먼지의 태동이 아닌가

견디지 못한 가벼움이
저들끼리 엉겨 붙어
서로를 다독이다가
미숙한 하루살이처럼
날아오른 것이다

가슴에 쌓인 그 무엇 같은
심해성층深海成層으로 가라앉은
찌꺼기들을 쓸어내린다

빛에 익숙지 못한 입자들이
풀풀 털려나갔다
죽은 하루살이처럼 숨이 가볍다.









대숲이 있는 해변마을

박금숙


바다가 잘 보이는
그 마을에 가면
사시사철 사이다 같은
청량한 대바람소리가 난다

온종일 목선 두어 척만
마을을 당겼다 놓았다 하는
해변에는 댓잎들이
마른멸치처럼 널려있고

옹이진 가지 하나
뻗어 올리지 않은 대나무 같이
일찍이 속을 비운 마을사람들은
관절마다 뱃고동 소리 평화롭다

해초처럼 자라난 갈매기 울음
석양을 머금은 바다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해도 그들은,

만선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대나무 한 그루씩 가꾸며
천년 바람에도 끄덕 없을
질긴 뿌리를 잇대고 산다.










마이산馬耳山

박금숙


촉각을 곤두세운
두 귀는
하늘로 솟았어라

천상의 소리 모아
이승의 시름 덜어주고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당당한 기품

경건한 풍경 속에
은은한 목탁소리
끊이지 않아
나무들도 가부좌를 한 듯
엄숙한 자태로다

억겁의 세월
모진 풍파 견뎌온
돌탑들 사이사이
굳건한 역사가 흐르고
 
소박한 꿈 쌓아올린
우리네 정성 지극하여
구름도 짐짓 비켜가는
신비의 馬耳山.









호수에 잠긴 달

박금숙


제 가슴 다 도려내고
싸늘한 호수에
처연히 잠긴 달

삼백예순날
만삭인 사랑 어디 있을까만
못내 사무쳐
눈썹까지 끌어당긴 수면水面
오죽이나 시려울까

밤의 시공으로
휘도는 검은 그림자
못다 이룬 사랑에
몸 던졌다는
여인의 전설 같은
슬픔
또는
그리움이여

아득히 먼
점성술의 별들 헤아리다
잊혔던 얼굴 하나
휘영청 떠오르리라.









산 안개

박금숙


간밤의 비에 몸 씻은
산 허리를
부드럽게 휘감은
우윳빛 살결

간지러운 햇살에
꿈결인 듯 몽롱히
전신을 뒤척인다

등살 가리운 베일
슬그머니 걷어 젖히고
몽글몽글 동심원으로
솟아오르는 젖가슴

품었던 연정도
소유는 아니런가

근엄한 산
행여 허물일세라
미세한 흔적까지 말끔히 걷어
유유히 물러가는 산안개.












6월의 에피소드

 박금숙


1
하늘 한 모금에
비비대는 저 종달새 좀 봐라
엄지발가락만한 몸짓이
저리도 자유로울 수가
호시절이란 저런 거구나
누구의 허락도 없이
문 밖의 영토를 누리는 것.

2
길모퉁이 나뭇가지에
외진 사랑 하나 걸려있다
굳이 애쓰지 않았어도
군살처럼 덕지덕지
짙어 버린 그리움
바람이 정수리를 흔들 때마다
그렁그렁 하늘이 시리다.

3
권태로운 태양이
누구 집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있다
아이 하나 토닥토닥 걸어 나온다
빛 고물이 눈에 들어갔는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손,
안에서 굵은 감자 한 알 튀어나와
흙 밭에 구른다
아, 길고 배고픈 한낮.

4
갑작스런 후드득 비,
그녀의 치마폭 같은 잎사귀에
치렁치렁 소문이 술렁인다
작년에 물꼬 터진 강둑
제방이 위험하다고
성급한 사내들 웃통을 벗는다
저런, 땀방울이 빗방울처럼
흘러서야 되리.
 
5
하찮은 파리 한 마리에
패를 건다
필사적으로 후려쳤지만
앗! 놓쳐버린 실수
창밖으로 아슬하게 멀어진
점·점·점 소실점
아차, 저 소실점도
살아가는 생명이었구나
한철 부여받은
우리와 같은 시간대 위의 운명.
























장마 記

박금숙


장대 같은 비는
연일 아픈 구석구석을 찔러 대고
패인 상처마다 습한 기억들이
푸른곰팡이처럼 피어오른다

간간 스치는 바람이
아릿한 생각의 끄트머리를
저만치 밀어내곤 했지만
이내 먹구름을 몰고 와서는
우울한 독백을 쏟아내고 만다
 
건너지 못할 강의 수심은
깊을 대로 깊어져
더 이상 슬픔의 깊이를
드러낼 수가 없다
차라리 역류라도 할 수 있다면
퉁퉁 불어 오른 기억들을
죄 흘려버리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때때로 열어 말리지 못한 속내들이
이미 먹구름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랫목 온기라도 지펴볼까
아, 오래 순환되지 못한 보일러가
웅웅 숨통을 열고
응얼졌던 피톨들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다.




해바라기

박금숙


내가 너를 닮았으면
오죽이나 좋겠니
쭉 뻗은 몸매에
벙그러진 함박웃음

금빛 치장도
하늘 보기 부끄러워
살포시 고개 숙인
겸손의 미덕

촘촘히 박힌 씨앗
여문 사랑으로
톡톡 터뜨리는
내가 너를 닮았으면
오죽이나 좋겠니.

















가을

박금숙


나,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다 했더니
가을이다
누구에게도 손짓하지 않겠다고
멀뚱히 바라보던
창문 하나 닫은 것뿐인데
가을이다

하늘빛 곱다
편지 한 장 써놓고
마지막이라 했더니
가을이다
뭉게구름처럼
가슴 엉클지 않겠다고
문득문득
하늘 올려다본 것뿐인데
가을이다

함께 걷던 길
불현듯 혼자임을 깨닫고 보니
가을이다
훌훌 가벼워지고 싶어
바스락,
낙엽 한 잎 밟은 것뿐인데
가을이다.









가을비

박금숙


타들어가는 목마름 끝으로
시름시름 가을을 앓는
비가 내린다
그립다, 말 한 마디 못하고
또 한 계절 깊어지고 있다

한때 발랄했던 지상의 생물들은
스산한 빗줄기 속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단 한 번의 몸부림도 없이
정해진 운명대로
홀연히 체념해야 한다

고독은 누가 묻지 않아도
그대로의 고독이다
사랑한 적도 없는데
빗물 흐른 자국마다
불같은 상처 입고
풍문에 온몸 떨고 있다

가을비는 저리 내리는데
누구하나 행적을 묻지 않는다.











귀뚜라미

박금숙


내 몸속 어디쯤
귀뚜라미 한 마리 살고 있다

밤에는 귀밑에서
낮에는 발밑에서

시도 때도 없이
글쎄, 글쎄, 울어대더니

누가 물음표만 던지면
글쎄, 글쎄, 대답한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가을 때문인가
귀뚜라미 때문인가
건망증 때문인가

















가을 산책

박금숙


마음 한가득
파아란 하늘이 고입니다

코스모스 흐드러진 산책길
작은 벤치에는
햇볕이 소복이 내려앉고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
낮은 음계로 들려옵니다

잠자리 떼 비행하는
풀숲 아래선
또르르, 또르르
아기 옹알이 같은 풀벌레 소리
바람 사르르 밀려올 때마다
살풋, 눈이 감깁니다

해바라기 씨앗은 여물었을까
곰곰 궁금하던 참새 한 마리
포로롱, 햇살을 타고 올라
긴 목울대를 흔들며
쉴 새 없이 종알댑니다

아, 이 아름다운 날
그대와 보폭을 함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길을 걷다가

박금숙


우연히 발길에 채인 돌부리가
힘없이 뽑히는 수도 있었네
한 번 뽑힌 돌멩이는
다시 길이 되지 못하고
저만치 홀로 구르다
실신한 듯 쓰러져있었네

스쳐 밟은 나뭇잎도
멍이 드는 수가 있었네
한 번 밟힌 나뭇잎은
다시 낭만과 꿈이 되지 못하고
죽은 듯 길바닥에 엎드려
무참히 짓이겨지고 있었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가
못이 되는 수도 있었네
한 번 못이 된 말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슴에 녹이 슬어
아픈 얼룩으로 남아있었네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닌 것들은
길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서 눈물이 되고 있었네.









겨울 햇살

박금숙


골목과 골목 사이
느슨한 햇살이 걸린다
거미줄처럼,
다닥다닥 붙은 햇살의 골목

바람도 짐짓
비켜서야 마음 편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손가락 사이에
고사리 같은 햇살을 끼고
고무공을 튕겨 올린다

와장창!
깨진 유리창 안으로
햇살이 꽁꽁 얼어붙는다.

















해질 무렵

박금숙


창문을 기대고 서서
태양이 지나는
하루의 고갯길을 지켜본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던
한 무리 새떼가
노을 속으로 일제히 침몰한다

순간의 잔상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떠나가는 뒷모습처럼
가슴에 길게 어린다

모든 것들은 그렇게
잠시 다녀가는 것뿐일까

허물없는 이름 하나
가두지 못한 텅 빈 공간에도
어둠은 빠르게 문지방을 넘고

오늘도 아무 일 없듯이
키 큰 나무 한 그루
여전히 긴 목을 빼고 있다.




아침

박금숙


흥건한 새벽의 기쁨으로
촉촉히 피어난 은빛 날개

밤새 서걱이며
살 부비고 일어선 풀잎 하나에
숨결 고운 바람 일깨우며

첫 밤을 보내고 마주하는
부끄러운 시선처럼
다홍빛 수줍음으로 눈뜬
꽃봉오리 하나 봉긋

굴러도 때 묻지 않을
수정빛 이슬 한 줌 주워 담아
햇살 한 가닥 풀어 마시는
숨 가쁜 공복의 오아시스여!





신록의 밤은 슬프다

박금숙


한낮 이글거리던 푸른 눈빛들
순식간 어둠 속에 숨어버린
검푸른 밤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곁에 있던 사람
홀연 떠나버린 것처럼
달빛 한 줄 스며들 틈 없는
적막한 형상들
앞 못 보는 가슴앓이로
신열을 토해낸다

잔주름 같은 바람에도
오싹 한기가 돌고
나지막이 열린 귀는
짐승들 울음소리 가득하다

소쩍새 암수 번갈아가며
서로 위치를 확인하는 소리
청개구리 어미의 혼을 달래는 소리
풀벌레 쓰릿쓰릿 가슴 시린 소리

울어야 할 것들만 소리를 내는
신록의 밤은 푸릇푸릇
알 수 없는 슬픔이 일렁인다.









장미, 너는

박금숙


어쩌면 너는
내 철석같은 사랑을 투기하여
몇 날 며칠
들끓는 애간장으로
목 놓아 울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사무친 선혈 끌어올려
불타는 꽃잎 피워낼 수 있었겠느냐

어쩌면 너는
한밤 내내
내 은밀한 침방을 엿보며
이 앙다물고
온몸을 떨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날 푸른 가시 돋우어
목숨 같은 생 줄기 지킬 수 있었겠느냐

어쩌면 너는
내 소홀한 사랑을 틈타
그리움의 표적이 될
유혹을 음모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매혹의 향기 풀어 날리어
길 나서는 남정네에게
생 빛 아침을 선사할 수 있었겠느냐







풀꽃 연가

박금숙


번지도 이름도 없는
가난한 땅에
제 이름 하나 외지 못한
백치로 뿌리내린 생이여

꺾일 듯 쓰러질 듯
다시 일어서는 위태로움은
연민 없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연약함의 무기런가

그래도 강인한 심줄쯤은
움켜쥐었다고 변명처럼,
청아한 하늘 우러러
생기로운 미소 머금었구나

화려하지 않았으니
버릴 것 있겠는가
잎 진자리 눈물 한 방울까지도
메마른 땅을 위해 뿌려지리니

가볍디가벼운 삶도
무심코 짓밟혔을 설움도
거센 수마가 휩쓸지만 않으면
말뚝 같은 행운이 되리라.







강가에 앉아

박금숙


난 데 없는 무더기 바람이
풍랑을 일으킨다

삶의 곡선처럼
희망으로 밀려왔다가
절망으로 스러지는 물결

중심의 파동이 크면 클수록
가장자리의 파문은
더 많은 주름이 지곤 한다

수초를 의지해 기생하던
몇 마리의 물고기가
자맥질을 견디지 못해
떠밀려와 맥없이 나동그라진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긴긴 장마 구정물 속에
눈알 부릅뜨고 살아남은 죄밖에

돌멩이 하나 던져본다
곧 만삭이 된 몸을 세우고
하늘로 입을 벌려
시위(示威)가 시작되리라.









나르시스를 위하여

박금숙


당당하고 싶었어요
봉우리를 우뚝 세운 산처럼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천부적인 자존심까지도
사려 깊게 포장되리라 단정했었지요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바라본 강물 속에는
사랑을 거꾸로 키워온
얽히고설킨 뿌리들이
못된 뿔처럼 울퉁불퉁 솟아있었어요

한동안 어지럼증을 앓았지요
의식은 침몰하고
허상만 흔들리는 산 그림자처럼

둥글지 못한
산 하나가 없어진대도
뿌리째 뽑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한철 피었다 숙일 줄 아는
꽃봉오리로 당당하게 피어날 수 있다면.











아카시아 숲 떼까치

박금숙


작열하는 태양 아래
흰 머리카락 풀어 날리어
진한 향내 후끈 달아오른
아카시아 숲

미끈하게 빠진
한 무리 떼까치가
신출귀몰 사위四圍를 휘젓는다

까가가~각 깍 깍
호젓한 정적 깨지고
어늘어늘 금간 하늘에서
팝콘 같은 꽃잎들
우수수 쏟아진다

저 망할 놈의 떼까치
모처럼 만의 데이트에
울렁울렁 꽃 멀미를 일으키다니.














저녁의 풀들에게

박금숙


어둠이 내린다고
성급히 몸을 숨기지 말라
밤이 외롭다는 것은
어둠을 더듬어본 자만이 아는 것

찬 이슬 어깨에
켜켜이 내려앉을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슬픔 또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본 자만이
그 두께를 아는 것이다

뛰고 나는 밤벌레들도
으슥한 질곡의 땅 속
기어다니던 시절 있었거니

낮 동안 어리석은 자들이
여린 속살을 짓밟아
앞이 보이지 않거든
잎 잎의 귀를 열어볼 일이다

밤바람이 왜
칼날 같은 소리를 내는지

살 속까지 파고든 아픔
인고의 몸부림으로
찢긴 흔적 지우며
여명은 그렇게 오는 거라고
총총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별들에게 가르쳐줄 일이다.




들꽃의 노래

박금숙


만경들판
흰 종이가루처럼 흩뿌려진
들꽃의 노래를 들었네

높은 곳도 낮은 곳도
낙오자도 승리자도
문명의 이기도 없는
순수의 노래였네

안팎 경계 없는
길 하나 반듯하게 닦아놓고
어제와 오늘의 막힌 가슴
시원하게 뚫어주었네

굽이도는 강바람도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더불고 어울어진
춤사위를 돋구었네

흔들리거라
흔들려서 
호흡 짧은 우리네 여름도
살풋한 바람 일렁이기를
나도 노래를 불렀네.










잠자리에게

박금숙


너는, 가을 전령사로
운명지어졌다
매미처럼 큰소리로
호령하지 못한다고
기죽지 마라

굳은 입술도 더러는
전쟁 용사의 무기가 될 터
삶은 타고난 기량으로
충분한 것이다

한철 말없이 살다 가더라도
그 가뿐한 날개로
그저 높이 높이 날아볼 일이다.

















가을 물빛

박금숙


쓸쓸하리만큼 고요하다
이토록 잔잔해지기까지는
얼마나 삭였을까
오장육부 다 헹구고서야
비로소 은발銀髮을 드리웠구나
골짜기로 흐르는지
강으로 흐르는지
속이 속 아니라던 장마철 역경
혓바늘처럼
짙푸른 이끼로 돋았건만
그 강한 억척도
심연深淵으로 지그시 낮추고
회한을 반추하듯
깊숙이 투영된 햇살에
귀밑머리 허연
갈대꽃으로 여울진 물결
바람 건듯 불 때마다
온 천지가 일렁인다.














단풍

박금숙


짝사랑은 죄였다
그대 허락 없이
함부로 얼굴 붉힌 죄

깊어지는 동안
행여 바람에도 흠짓, 놀라
실핏줄 곤두선 위태로움에
나는 괴로웠다

허나,
눈부신 아픔 하나쯤
꾸-욱 찍어두는 것도
가슴 훗훗한 행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

지상에서
가장 강렬한 빛으로
오직 그대만을 겨냥한
내 안의 사랑이었으니

한 방울 눈물처럼
가볍게 뚝-
떨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후회는 없으리라.








가을, 마음을 위한 기도

박금숙


흔들리되
코스모스처럼만
가벼이 흔들리게 하소서
바람에 쉬 꺾이지 않고
제자리에서만 가만가만
아름답게 흔들리게 하소서

쓸쓸하되
들판의 곡식처럼만
여물어지게 하소서
식어가는 가을볕에도
움츠리지 않고
마지막 온기까지
결실을 인식하게 하소서

떠나고 싶되
울타리 안의 낙엽처럼만
멀리 가지 않게 하소서
한 잎 한 잎 흩어졌다가도
다시 울 밑에 모여들어
서로 다독일 수 있게 하소서

이 가을엔 결코
슬프거나
혼자이지 않게 하소서.








소국小菊

박금숙


그 야무진 꽃망울
톡톡 터지는 모습 꼭 한 번 보겠다고
시장에서 값싼 小菊화분 하나 사다가
베란다 볕 잘 드는 곳에 앉혀두었다

아침마다 기꺼운 표정들이
고향 마을 인정처럼
들썩들썩 피어나고
어느덧 집안 가득 퍼지는
노란 햇살

바람 쌀쌀해도
사는 일이란 그렇게
떠들썩 웃어보는 일이라고
따끈한 차 한 잔에
가만히 미소 한 잎 띄워본다.















입동立冬

박금숙


살얼음을 타고
잘도 왔구나, 겨울은
상강霜降을 맨발로 지나온
아직은 얇은 외투차림인데

어젯밤 된서리에
꽃잎처럼 찍어놓은 까치 발자국
아침을 물어 나르는
발끝이 시렸나보다

바지랑대 타고 오르다
수척해진 나팔꽃 줄기
가는 허리를 단단히 졸라매고
못 다한 말처럼
여문 씨앗을 뱉어내는데

먼 길 떠나온
벌판 같은 마당 한 편에
싸늘한 아침빛이
계절의 경계선을 긋고 있다.











초겨울 풍경

박금숙


연한 햇살이
죽은 꽃나무를 감싼다
곱고 화려한 무리들의
한바탕 축제가 끝난 거리는
이별에 대한
사소한 소문만 술렁일 뿐,
새들도 소란스럽지 않아
얕은 잠에 취하고 싶은 나무들
순록의 뿔 같은 가지를 치켜들고
부스럼이나 털고 있다
어지럼증 앓던 건물들도
이제 감추고 싶은 이력들을
하나 둘 밀어 닫아
빛바랜 콘크리트 외벽에
마른버짐 피어오를 것 같다
바람의 수위 간간 높아져
사람들 저마다
피안彼岸의 길을 걷듯
한 발짝씩 빨라진 발걸음,
돌아본 시간 너머엔
어느새 산 하나 담채화로 주저앉고
옷깃마다 첫눈 같은 속살 일어
수염 까칠한 들판 어디쯤
하얀 발자국
다가오는 소리 들린다.









송년의 노래

박금숙


해가 저문다고
서두르거나 아쉬워하지 말자
처음부터 끝은 없었던 것
세월의 궤도를 따라
지칠 만큼 질주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어제의 일조차 까마득히 잊은 채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길을 돌아왔을 뿐
제각각 삶의 무게에 얹혀
하루해를 떠안기도 겨웠으리라

잠시 고된 짐 부려놓고
서로의 이마 맞대줄
따뜻한 불씨 한 점 골라보자
두둥실 살아있는 날은
남겨진 꿈도 희망도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사랑도 봄처럼

박금숙


만물이 자라는 모습
제각기 달라도
마주보며 입김 불어주는
연푸른 봄의 숲처럼
싱그러운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와 꽃, 햇볕과 바람
모두가 제 빛 지니고 어우러져도
있는 듯 없는 듯
봄빛 수채화 같은
은은한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
눈 시린 하늘만 바라보고 섰어도
지루하다 고개 돌리지 않고
밤하늘 별빛 기다리는 봄 나무처럼
느긋한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쯤 비가 내려
흥건히 젖은 어깨 반쯤 늘어져도
물기 뚝뚝 흘리며
하얗게 웃고 있는 벚꽃처럼
해맑은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사람이 봄길을 걷다

박금숙


겨우내 소화불량
끙끙 앓던 눈사람이
심장에 스멀스멀
아지랑이 피어올라
체증 확 가셨네

찰싹 붙은 엉덩이
송곳니로 콕콕 찔러대는
새싹들의 성화에
뒤뚱뒤뚱 걸어서
봄 길로 나가보네

녹아내린 허리는
개울가에 던져두고
버들가지 속살에
한눈을 파는데

미나리, 쑥부쟁이, 코딱지 나물...
와르르 쏟아져 나와
외계인 구경하듯
히죽히죽 웃고있네.




진달래 꽃잎 지던 날

박금숙


부슬부슬 봄비에
진달래 꽃잎 지던 날

아버지 상여 따라
서럽게 울던 사내

어디 갔다 왔는지
서랍에서 불쑥

진달래 꽃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네.






















봄비

박금숙


토닥토닥 빗소리
낮은 음성이었구나
마음속 쌓인 먼지 털어주는
그대의 속삭임 같은

아롱아롱 빗방울
맺힌 사랑이었구나
마른 어깨 촉촉히 감싸주는
그대의 눈빛 같은

어느새 뚝,
짧은 미련이었구나
손놓고 가버린
그대의 희미한 발자국 같은

그랬구나.
그리움 걷어들이지 못하고
서성이는
눅눅한 내 마음 같은













4월의 꽃가지

박금숙


지상의 필요충분조건
다 끌어안고
하늘 중심의 끝에
팽팽히 맞서
누구 하나 찌르고도 남을
도도한 자태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잎새마저
당당하게
목젖 빳빳이 세워
가지가지 받들고

부풀어 터진 혈관마다
탱탱한 미소로
벙그러진 꽃, 숨 고르다
급기야
화들짝
눈부신 절정의
독무대에 오르다.













다비식(茶毘式)

박금숙


나비가 죽었다
가시 돋친 햇살에
눈알을 찔려

개미들의 행렬로
성대한 다비식(茶毘式)

이 환장할 봄날
배부른 개미에게도
슬픔은 있는가!




















나이 불혹에 알았습니다

박금숙


당신은 남자
나는 여자
그렇게 제 할일만 하고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글쟁이는 잉크에 미쳐야 하고
그림쟁이는 물감에 미쳐야 한다기에
나도 무언가에 미쳐 살면
그 뿐인 줄 알았습니다

글쟁이도 그림쟁이도 아닌 내가
그릇에 밥만 담을 줄 알았지
사랑 한 술 담을 줄을 몰랐습니다
때론 식탁에 김치보다 꽃 한 송이가
더 절실하다는 걸 몰랐습니다

나이 불혹에서야
당신 밥알에 돌이 씹힌다는 걸 알았습니다
차마 뱉지 못하고 이가 아리도록
꾹꾹 씹어 삼켰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신이 내민 커피 한 잔에
아픈 눈물이 씹힙니다.









해 그림자
박금숙


곱던 빛 다 내어주고
달랑 제 그림자 하나 업은 해가
산마루에 오도커니 앉아있습니다

이 고랑 저 고랑
긴 해를 쫓아 밭일하시던
어머니의 해가 눈 지그시 감고
애틋하게 앉아있습니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흐린 해 그림자
어머니의 근심인 줄 모르고
비를 좋아했던 철부지
이제야 가슴이 멥니다

어머니!
오늘은 바람 선선한 산마루에
쉬고 계신 당신의 그림자가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상족암(床足岩) 공룡 유적

박금숙


중생대 백악기
이 영토는 오직
그들의 낙원일 뿐이었다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몸짓도
한때는 연못 같은 해변을 거닐며
해초를 줍고, 사랑을 나누고,
수평선 너머
배 한 척 오기를 기다리는
그리움이 있었다

억년의 세월 쓸쓸히 지나
어느 날 바위 하나 무너져 내리고
그들의 멸종을 지켜보던 우리는
영혼 같은 발자국을 점령한 채
종족을 거느리고도
또 다른 욕망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들어보자
화석으로 굳어
바다 깊숙이 침몰하는 영혼들의 신음을
우리는 몇 억년을 살다
멸종할 것인가.


* 상족암(床足岩) -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위치한 군립공원으로
  100여 개의 공룡 발자국이 밀집해 있는 곳.













박금숙


벽과 벽은 아득했다
마주보는 눈빛조차
금이 가기 시작했고
서로 닦아줄 수 없는 얼룩은
차라리 상처였다

벽끼리 뿜어내는 침묵은
차갑게 흐느끼는
새벽 강물이 되고
어둠으로 돌아누운 벽은
끝내 당길 수 없는
그림자가 되고 있었다.




















행복한 새
박금숙


수풀 우거진 산속에
아치형 풀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새 한 쌍 있네

아침에 눈을 뜨면
고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풀잎 하나 뜯고
이슬 한 방울 주워서
풋풋한 아침 식사를 하네

햇살 가득 퍼져
깃털 보송보송 마르면
나란히 날개를 펴고
들로 산으로 소풍을 가네

꽃 나비 벌들과
정답게 노닐다가
산나물로 점심 먹고
빛 고운 열매로 간식을 먹네

밤이면 달빛으로 불 밝히고
고단한 날개 죽지
가만가만 쪼아주다가
다정히 품을 맞대고
초롱초롱 별 꿈을 꾸네.







낯선 곳에서의 불면

박금숙


좀체 날이 샐 것 같지 않은
어둠을 더듬어 밖을 살핀다
아직 보금자리를 찾지 못한
몇몇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설움을 토해내고 있다
십수 년 전 쓸려갔던 몹쓸 표정 하나가
파도처럼 거칠게 밀려온다
소라껍데기 이 울림 같은
행·복·하·세·요

잠은 밝은 곳으로부터 왔다가
어둠으로 사라지는 걸까
어쩌면 그도
밤을 재촉하는 냉혈동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문득 스친다
감았다 뜨면 덧칠해지는 낯선 어둠은
궁색한 마음까지 가리지는 못한 모양이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베개 위에 꽂힌다.













사랑의 여백

박금숙


내가 안주(安住)할
집을 설계함에 있어서
거실 벽엔 최소한의
미니 액자 한 개만 걸어
여백의 미美를 살리기로 하고
씽크 선반에는
꼭 필요한 그릇 몇 개만 올려
부딪히는 소음을 줄이기로 한다

발코니 유리창에는
커튼 대신 계절을 드리우고
화단에는 나무 두어 그루 외
철 따라 색다른 화초 가꿀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을 두기로 한다

더 이상 채운다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허욕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 위해
마음 넉넉히 비워
시시각각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하얀 여백 남겨두기로 한다.











가을로 다가온 친구야

박금숙


헤이즐럿 커피 한 잔을 들고
베란다 끝에 서서
막바지 푸르름에 혼신을 다하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지

들꽃들의 향연이 이어지는 산책길,
자잘한 풀들까지 육안으로 확인될 만큼
가까운 그 길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할 정도로
난 왜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살았을까

하지만 너를 알고 나서
모든 게 달리 보인다는 것
하늘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았고
늘 같은 자리에 나란히 가지를 쪼는
새들의 다정함을 알았으니까

그래,
황량한 사막에 희귀의 싹이 돋는다 해서
크고 튼튼한 나무 되지 말라는 법 없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런 나무 말이야

사람이 나무처럼
긴 세월을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는 동안 한 번쯤 누군가에게
뿌리내리고 싶은 건 마찬가지 아닐까

더운 여름 다 가고 가을로 다가온 친구야
이왕 한 발짝 다가섰으니
우리 함께 떨어지는 낙엽이었음 좋겠다

그리고
새봄이 오면 그 자리에서 다시
새잎으로 돋아나 만날 수 있는
나무이었음 좋겠다.


차 한 잔 하실래요?

박금숙


그대, 차 한 잔 하실래요?
더러 쓸쓸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무작정 나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명분 없는 만남이라도 좋고
근사한 카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수수한 차림으로
허드레 이야기나 나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홀가분해지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어떨까요?
걸음걸이 비틀거릴 지라도
시간은 똑바로 흘러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을 보세요
일에 취해서
피로에 취해서
고독에 취해서
다들 힘겹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빈들에 서다

박금숙


무엇하나 탕진할 것 없는
빈 몸이다
몇 해 전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매던 때도
이렇게 절망스럽진 않았다

떠나는 날까지
헐렁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던 너를 보내고
목숨보다 질긴
불운에 목을 놓으며
죽음으로 보낸 한 달

누구를 위해
어디로 가야 할까
살아있는 것은 오직
하루를 돌아도 지칠 줄 모르는
빈 들녘의 바람 뿐…

죽어 쓰러진 나무가
시신처럼 누워있다
살아 울창한 숲 한 번
이루지 못하고
혼자 휘청대다가
스스로 뿌리를 말려
죽었을 것이다

문득, 돌아본 등 뒤에
붉은 덩어리 하나
떨어져 제 살을 태우며
논바닥에 뒹굴고 있다
멀리서 힘껏 달려온
내 어린 사내의 환청이
고막을 갈갈이 찢어놓는다.










첫눈

박금숙


얼마나 오래 참아온
첫 고백인가

빛으로 말하는
순백의 언어들
살포시 내려앉아

지상의 여린 마음씨마다
눈부신 설레임 일깨워

미처 마르지 못한
눈물 한 방울
하얀 숨결로 승천시키는

열두 달
쌓이고 쌓인
그리움의 파편이어라.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1-06-18 00:25:01 수정과 추가에서 이동 됨]
2 Comments
가을 2007.05.26 04:31  
안녕하십니까.
우선 처리가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요청하신 시는 85편이 아니라 84편인 것 같습니다.
시집 <하얀 그리움>에 수록 시 84편을 본 웹사이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poemlove.co.kr/?doc=psearch.php&writer=박금숙
가을 2007.05.26 04:50  
1부 잎새 바람에 있는 시 <나뭇잎 배를 띄우며>가 빠져서 추가 게재하였습니다.
시의 전문이 맞는지 확인을 부탁합니다.

http://www.poemlove.co.kr/?doc=bbs/gnuboard.php&bo_table=poem&wr_id=9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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