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을 꿈구는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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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을 꿈구는 시인들

자전거 0 1182
적멸을 꿈꾸는 시인들

청곡 민명기를 기리며
청곡민명기 상 준비위원회에서
시인들의 시를 보다가
몇몇 시인들의 시에
눈길을 모은다
영문학을 영시를 30년을 대학에서 가르치고
공부한 사람이 이론적으로는 외국어 교육에서
새로운 페러다임으로 제세되고 있는
의사소통 접근법(Communicative Approaches)을
영문학에 접근 시켜보고자 시를 통한 의사소통을 시도도
해보지만
언어학자 Wilkins의 기능적 관점에서도
외국어 교육의 목표를 하임즈(Hymes)가 지칭한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의 함양에 두나
평생을 초등교육에 힘쓰시고  한마디 유언도 없이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언은 무엇이엇을까
나는 아침에 일어나 책 장에 보인 2004년 영미문학교욱 학회지를 본다
내가 교육시킨 30년동안 제자들은 다 무엇인가
같이 머리를 맡대고 토의한 학과 교수마저
서로 등을 돌리고
교수가 제자 된 연구실에서 그래도
법과 문학 학회를 말하고
미국대법원 판결문을 이야기하고
나는 시를 쓰다고 시쓰는 일도 부질없어 멍하게 보다가
학회지를 보다가
Incorporating Communicative Approaches into Teaching English Drama:
A study of a New paradigm in Teaching English Literature
현재 영미그림책과 다문화영미아동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Gary Snyder 미국 시인이 계시는 UC Davis 어도선 교수doseon@korea.ac.kr 의 논문을 보다가
적멸을 생각하다가
2009년도 영미문학교육 13집 1호에 실린
박령 신라대학교 교수의 삶의 경험으로 영시 교육 논문을 보다가
051-999-5224번호와 그의 시 산우제
그가 말한 Shelley의  A Defence of Poetry글을 본다
 시는 모든 것을 사랑스러움으로 바꾼다. 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가장 기형의 것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시는 찬양과 공포, 슬픔과 기쁨,영원과 변화를 결합시킨다.
시는 모든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의 빛으로 지배하여
통합시킨다.
시는 그것이 만지는 모든  것을 변회시키며, 시의 현존의
광휘 안에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

시는 우리가 속하며 지각하는 공동의 세계를 재생산하며,
우리의 존재의 경이를 가리는 낯익음의 얇은 막을 우리
내면의 눈에서 벗겨낸다.
시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느끼게하고 우리가 아는 것을
상상하게 해준다.
시는 반복으로 무디어진 인상의 재현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주가 소멸된 이후에 그 우주를
새롭게 창조해준다. 













한 사람 말을 하기가 두려운 시대에
아버님은 나의 말을 받아 주셨던 유일한 분이다
아버님을 위해 시의 날 11월 1일에 시의 상을 제정한다










이 시대에 참으로 순수빛으로
시를 만드는 시인의 향기가 가을 들판에
향으로 가득하다
이 아침에 온통 어둠으로 밝힐수 없는 시대에
끊임없이 향불 피어 놓고 아름다운 고운 시를 쓴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올 봄해 만일 조금만 저희 구남매 자식들이
부모님한테 효도를 하엿다면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뜨시지는 않았을
청곡 아버님 민자 명자 기자 아버님의
이 아침 일어나 참으로 불경을 읽으시며
기도드리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좀더 보앗을 터인데
불효한 자식들은 아버님 혼자 건강을 돌보지도 않고
이제는 아버님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저 세상 하늘에서
오늘도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실 아버님 생각에
이 아침에 일어나 아버님 어머님이 안계시는 하늘이 밝아 오길 기다리며
어느 시인의 맑고 고운 시 한편을 읽어본다
시집소개에는

우리는 지금 모든 가치체계의 뒤섞임 속에서 절대적 진리까지도 파괴되는 카오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떠한 문학행위도 장르의 넘나듦과 헤체의 소용돌이 안에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의 지친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 욕망과 죽음과 속도가 질주해간 척박한 한 세기의 끝에서 우리는 새로운 천 년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천 년의 지나간 시대를 돌아본다. 거기 오롯이 남아 가장 오랜 세기 동안 우리의 민족과 함께 살아 숨쉬어온 하나의 엄연한 실체를 만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몸과 영혼을 벗어두고 마른 바람과 거친 모래 날리는 사막 사운데 서 있었다.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옷과 우리의 정신을 이제 남루하지만 우리의 몸과 영혼에 새롭게 단장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새소리와 들길과 못 생명과 가락과 숨결과 고귀한 자유를 새로운 천 년 우리 구원의 시학으로 삼고자 한다.




하순희는 '민족적 비극'(<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개인의 실존적 슬픔'(<엉겅퀴>) , '눈물겨운 삶의 현실'(<비, 우체국에서>) , '자본의 폭력성'(<대형마트에서>) 을 각각 응시하면서 적멸을 꿈꾼다. 불교용어인 적멸(寂滅)은 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심신 일체의 활동을 멈추고 평정해지는 것으로 적정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을 여의고 있는 상태로서 열반, 부처의 경지, 깨달음, 궁극의 깨달음, 깨달음의 경지 등이 이에 속한다.

하순희는 종교적 적멸을 꿈꾸어야 할 만큼 이 세상은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임을 인지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안에 잡힌 현실은 세상의 정치나 법이나 윤리로 해결하기에는 이미 이 도를 넘어버린 형국이 아닌가. '난타하는 채찍질'을 '온몸'으로 버티며 단지 희망이라곤 적멸을 꿈꾸는 것밖에 무엇인가. 고단한 삶의 여정이 '헤진 신발을 끌며' 가는 길로 처절하게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눈감아도 젖어오는 흐린 날의 강둑에서 장작 한단으로 몸 하나 깨끗이 사루어 흩뿌리고 이름없는 늑골로 적멸에 들고픈 홀씨 바람결에 날아간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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