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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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1

자전거 0 1241
광주항쟁1

광주항쟁 1

나는 이런 신 새벽에 일어나
아주 슬픈일은 아니지만
지나간 슬픈 사건들을 머리에
자막을 넣어 영상을 본다.
지난 번  장흥천문섬애서 만난
공선옥 작가는 광주사건을 소설로
쓴다지만 나는 가장 긴
단테의 신곡 지욕편 같은
긴 서사시를 쓴다.
이 서사시는 모든 것이 단지
사실을 근거로만 쓴다.
광주항쟁은 영어로 일어로 독일어로 번역을 하여
온 새상에 알리고 싶다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 장병들이 계염군으로 광주에 파견되어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이에 격분한 광주시민들이 맞서 10일 동안 벌인 총체적 저항운동을 말한다. 이 항쟁으로 무려 311명(최근 5.18민주유공자유족회는 총체 사망자를 653명-당시 사망 165명,상이 후 사망 376명,행방불명 65명, 군경사망 27명-으로 발표)의 희생자와 3046명의 부상자,439명의 구속자를 낸 비극이었다.
 5.18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철저한 비호를 받으며 정치군으로 성정한 신군부가 비명으로 간 박정희를 계승하여 신유신체제를 수립하려는 프로그램인 다단계 쿠테타 과정의 제 5단계였다. 12.12반란은 다단계 쿠테타의 제1단계였다. 전두환은 3월들어 K-공작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는 제2단계와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통해 정보독점과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는 제3단계를 넘어서면서 정권찬탈의 프로그램을 차질 없이 진행시켜 나갔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를 “시국수습방안”을 미리 작성한 후 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형식을 빌려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하는 한편 국무회의의 의결절차를 밟아 5.17조치를 단행, 정권장악을  구체화시켜가고 있었다. 그 명분용 소요가 일어나기 가장 알맞은 지역으로 전라도의 중심도시 광주를 선택하고 그 고장 출신 김대중을 처치하면 폭동유발과 정적제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계산아래 김대중 체포와 동시에 혹독하게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 무자비한 살육작전을 펼치도록 했다.
 공수부대의 작전은 광주시민들의 반발심리를 자극해 분노와 울분을 극도로 치딛게 하기에 충분했다. 선량한 시민들은 분노의 공감대를 이루어 ‘성난 민중’으로 돌변, 대규모시위를 벌이며 저항의지를 불태웠다. 신군부의 의도는 대성공이었다. 광주시내는 구타당하고 대검에 찔린 젊은이들, 아니 모든 시민들이 울분으로 가득찼다. 선량한 시민들이 저항과 투쟁을 다짐하며 ‘성난민중’이 된 것이다.
 그러나 광주에는 성난민중을 이끌 지도자나 조직이 없었다.18.19일과 20일 오전까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운전기사들은 5월 20일 오후 자신들의 차량 200여대를 몰고 금남로를 거쳐 공수부대 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도청광장 앞까지 진출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뒤를 따르며 ‘이제는 우리도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20일 밤은  80만 시민이 모두 뒤쳐나온 듯 시가는 온통 사람물결이요, 구호소리도 가득했다. 떠나갈 듯한 승리의 함성이 광주하늘에 메아리쳤다. ’광주사태‘에서 ’광주항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부처님이 오신 날’인 21일 낮 1시, 애국가를 신호로 발포명령이 떨어지자 공수부대는 한 단계 높은 국가폭력인 집단발포를 단행했다. 민중들은 맨 손으로 불가는하다는 판단아래 광주교외로 나가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이나 M! 소총으로 무장하여 공수부대에 대항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민군은 최정예군인 공수부대 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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