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계열의 서정시인/논문작성이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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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계열의 서정시인/논문작성이영지

2. 모더니즘 계열의 서정시인



홍문표 시인은 곧 모더니즘 계열이고 정지용의 이미지 중심계열에 서며 정지용의 도시적 모더니즘과는 다르게 서정적 모더니즘 시인이다.
따라서 서정성을 지니면서 하나님을 향한 에덴으로 가기의 싹을 내는 홍문표 시인의 일의 진행형은 길떠나기의 신앙 영웅신화를 형성한다. 히브리어가 말하는 진행형 א(알레프)이다. א(알레프)는 묵음이지만 앞 모음을 장음화 한 기법으로 하여 싹 냄을 표면구조로 한다.
다음은 창세기 1장 1- 2장 3절까지의 어미형 א(알레프)이다.


 א(알레프)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는 의미의 내면구조로 생명에 대해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사람이나 모든 생물이 살아 있음을 보게 하시었다. 성경에서 어미형 א(알레프)와 숨 쉼의 반복리듬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숨 쉬며 오늘도 사람들이 일과 잠과 사랑을 하면서 연구하며 숨을 쉬고 살아간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의미로 성경에서 진행형 א(알레프) 상태가 성경히브리어 단어 끝에 놓여 질 때이다. 가장 끝자리이다. 하나님이 눈으로 보게 하시는 일이다.
문학은 모자람의 자리에서만이 호소력이 있다. 잘 낫다고 뽐내는 것이 아니다. 예기에 악기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따. 그러기에 이 낮춤의 소리는 그리고 자세는 그 음향은 시인의 마음에서 울어나는 소리이기에 태극이다.
홍시인의 특징은 믿음으로 시작된 날마다의 주를 바라는 일상의 시작을 ‘나비야 청산가자’로 시작하였다. 순수의 색채리듬으로 엮어진 하나님의 길을 찾는다. 이 길떠나기는 그 길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가는 발걸음의 음향리듬을 청산으로 한다. 그 이유는 지상이 ‘짓밟혀진 계곡=부정한 약탈이 핏발을 세운 곳’이기에 그 정상의 장소는 반대로 ‘구름으로 닦여진 은빛 순수의 흔적= 정숙이 있을 곳이기에 청산을 향한다. 순수와 정숙은 파란 이끼가 끼도록 기다림의 순수와 정숙이 있어서이다.
비록 그 기다림의 파아란 이끼색이 지상의 무모한 허무일지라도/ 오를 수 밖에 없는‘ 색채리듬이다. ‘오르다 오르다 지쳐/ 스러질 수 밖에 없는’길이라 할지라도 계속 될 것을 선언한다. 싱싱한 산맥의 혈기를 뽑아 위해 정상을 찾는 색채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나비야 청산가자의’의 정상을 향한다. 
홍문표 교수에게 있어서 나비야 청산가자의 철학은 ‘정상’을 향한  자기 초점적(self-focused))이다.

(2). 당신의 황금 불빛나팔

홍시인의 시적 진실은 절대자인 ‘당신’을 선호한다. 이 두운리듬이  가장 다빈도 현상을 보인다.

강산(2), 강물(4), 공화국, 광화문, 경건, 뭉게보았지만, 당신(18), 땡볕, 빙벽, 동산, 동심, 동양화, 동침, 동화(2), 덩달아, 등불, 등뼈, 덩달아, 명산, 망극, 망우리, 망초꽃, 목청, 뭉게구름, 봉사, 봉우리(5), 빙하기, 상식, 성문, 성전, 성호, 성황당, 송곳니, 송신, 송이(2), 송이버섯, 송화가루, 생리, 생존, 승부, 승천(2), 싱그러운, 망초꽃, 목청, 몽불랑, 명산, 뭉게구름, 봉우리, 봉사, 빙산, 빙하기, 양식, 양심(2), 양지바른(2), 억년빙설, 영산, 영산홍, 영험, 영혼(5), 왕국, 왕솔밭, 웅크리고, 옹크린, 웅크릴, 장단, 장백산맥, 장승백이, 장엄한, 장한가, 정결, 정기, 정념, 정수리(3), 정의, 정절, 정지, 종달새, 정숙, 중년, 중턱(3), 징후, 창가, 창세, 창세기, 창문, 청산(7), 청계천, 청산별곡, 청아한, 층계, 칭얼, 텅빈, 통일, 펑퍼짐한, 평안, 평원, 풍만(2), 풍선, 텅빈, 향기, 향기, 항거(2), 홍살문, 황금, 황금빛, 황토빛, 황홀(2), 행복, 흥얼, 흥얼흥얼.

당신의 존재에 대한 색채리듬은 불로 비유된다. 이 불은 황색 성막안에서만 타오른다. ‘당산’은 절대자이고, 그 절대자가 있는 성막은 커텐이 드리워진 곳이다. 그 표출된 황색 성막 위에 머무는 당신을 향한 음성은 성막을 향한 신앙신의 자세이다, 그곳을 향하여 황금나팔의 음향리듬과 성막 표시가 되는 색채리듬의 조화로 불을 켜려 한다. 그 불을 바라보는 마음의 우러름이 있다.

하늘로 뻗은 기다림의
눈물같은 표적
자욱한 상념으로 열려지는
당신과의 아슬한 미로가 되고
무수한  고뇌의 갈피를 헤치고
돌작밭을 걸으며
전신으로 진동하는 당신의 예감
- 「날마다 산에 올라」2에서


‘당신 심장’은 빛의 본산지이다. 이 박동이 들리는 울림을 알아채리는 감동은 자생적 황금나팔의 음향리듬으로 전이된다. 무수한 돌작밭을 황색색채리듬과 고뇌의  심상색채리듬은 합하여 황금나팔소리를 듣는다. 이 리듬은 ‘당신’이 부는 눈물 같은 표적이기에 길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뜻에 따라가는 시인 자신도 황금색채 리듬에 들게 된다. ‘당신’이 있는 성막과 신앙인과의 관계는 구름을 상징성으로 하여 철저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응하는 모습이다. 바로 구름이 머리 위에서 증거막 위에 내려 올 때에는 행진하지 아니하고 머물렀으며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하는 것이다. 청산을 향하여 가자고 하는 음향은 홍시인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황금나팔인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다.
곧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황금나팔로 하였다. 이때  둘을 만들어 부는 일이다. 청산을 향하여 가는 방법으로 나팔을 불 때 적진을 향하여 갈 때는 나팔을 울려 불지 않는 점이다. 곧 하나님 말씀에 따라 세상을 향하여 그의 나팔을 불 때, 말씀을 전할 때에는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내 마음의 정수리
남은 것은 나와 당신
아니 당신만이 성벽처럼
우뚝한 두려움
- 「날마다 산에 올라 8」에서

당신과의 언약이 소중하였기에
한 때의 화려했던 손짓들과
초록의 기억들을 계절의 발밑에 묻고
선연히 시간의 빛살을 접는다
- 「낙엽을 밟으며」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시인의 삶은 언약궤를 함부로 만지지 못하는 규례대로 움직이는 홍시인의 생활이 표시되었다. 규례대로 ‘언약’게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팔을 붊은 지성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지성소는 성막안이 있고 이곳은 울려 퍼지는 음향이 있는 본래의 곳으로 ‘당신’이 있다. 따라서 나팔을 붊과 언약궤가 있는 곳이 중요하기에 나팔을 불어야 하는 삶이 전개된다. 이 역설성의 시적 은유는 성막과 시인의 합일이다. 시인의 심상 속에는 첫째 구름이 늘 머무는 곳이다.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은 구름을 따라 움직이는 시인의 믿음의 깊이이다.
당신은 ‘손’으로도 은유된다. 이 절대자의 손은 치료해주시는 손이며 그의 나라와 의를 움직이는 자를 어루만지신다. 대면해 주신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춘향을 향하여 너의 머리를 들라 그리고 나를 보라 하고 대면하기를 원하듯이 따스한 손길인 절대자 손길인 은총을 받고 싶어 한다. 홍시인의 손은 하나님의 손길에 비해 보잘것없음을 고백한다.

손에 잡히는 것은
거칠은 목질의 피부
- 「이맘때면」에서

그 아슬한 깃발의
희디흰 고독을 보고
그 정수리의 무서운 잔인을 보고
내 손의 까마득한 절망
추락하는 욕망의 허물어짐을 보고
내 목숨의 가난을 보고
이렇게 멀리서 떨고반 있는 것은
지고한 높이에서
하늘을 꿰뚫고
권력을 움켜진 너의 승리
성문을 허물고 다가서는 나팔소리
- 「에베레스트 정상을 보고」에서

그러나 내 손에 들려진 자유는
늘 떨리는 두려움
부끄러운 눈물 몇 점
- 「시내산」에서
원망도
미움도
새벽안개
부질없는 허공이야
움켜 진 손마디
이제는 손을 펴고
- 「나비야 청산가자 4」에서

홍시인의 손과 절대자인 당신의 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 손이 있는, 당신이 있는 곳은 하얀 세마포로 커텐이 드리워져 있고 동쪽 문은 항상 열려 있는 청산이다. 허름한 해달 가죽 커텐으로 되어 있어서 얼핏 보기에 알아 보기 힘든 곳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기에 인도해야 하는 곳이다. 이 말씀이 있는 곳을 홍시인이 감당하려 한다. 땀방울로 얼룩진 빠알간 물기가 있고, 내장과 뼈를 태워 번제 드리면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다. 그제서여 새로 태어난 자의 음성이 울릴 수 있는 곳이다. 그 음성은 물두멍에 물을 길어 손을 씻고 발을 씻은 뒤 하얀 세마포와 커텐을 열고 나오는 드맑은 영혼의 음향리듬이다.

그녀는 늘 당신뿐이라고 했다
때로는 태양이라고 했다가
단 한 번의 목숨이라고도 했다
-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서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언약궤가 있는 곳에 계신 ‘당신’은 언약궤를 가진자이다. 숫송아지의 피를 흠양하시는 ‘당신’은 심자가 보혈로 씻음을 주는자이다. 그 피로 씻음을 주시는 분이다. ‘당신’은 돌판에 10계명을 가지고 있고, 지팡이와 항아리를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이 당신은 그릇을 먼저 예비하게 ㅏ시는 분으로 그 내용물 또한 주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신 후 모리아 산상에서 어린 이삭을 요구하신 분이다.
그런 후 그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니 여호와로라 하심을 보는 홍시인의 마음은 그 분의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분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법을 기록하라 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에 이를 기록한다. 홍시인의 시가 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하시고 너는 내 백성이라 하신다. 이 분이 계신 곳에 머물려 오늘도 홍시인은 에덴을 향한다.
하얀 세마포로 커텐이 드리워져 성막, 동쪽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얼핏 알아 볼 수 없지만 동천(東川),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된다. 홍문표 동천의 바닥에는 땅방울이 얼룩져 빠알갛고 내장과 뼈를 태워 번제 드리려 새롭게 태어나기를 희망하여 에덴을 향한다. 

산이 산인 것처럼
눈물이 눈물일 수 있다면
눈물은 눈물이 되고

산이 산인 것처럼
믿음이 믿음일 수 있다면
믿음은 믿음이 되고

산이 산인 것처럼
사랑이 사랑일 수 있다면
사랑은 사랑이 되고

산이 산인 것처럼
당신이 당신일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되고

산이 산인 것처럼
평화가 평화일 수 있다면
평화는 평화가 되고

산이 산인 것처럼
노래가 노래일 수 있다면
노래는 노래가 되고

산이 산인 것처럼
산이 산인 것처럼
산이 산인 것처럼
- 「산이 산인 것처럼」

절대자의 모습에 따라 움직여지는 시인의 에덴으로 가는 신앙영웅의 길에는 늘 새롭게 태어나는 자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늘 평을 쓰며 학문을 연구하며 시를 쓰는 본인에 대한 스스로의 감사함이다. 잘한다 칭찬하시는 분의 음성을 듣는다.
그 음향리듬은 물두멍에 물을 길어 손을 씻고 발을 씻은 뒤 하얀 세마포의 커텐을 열고 나오는 드맑은 영혼의 음성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는 음향이다.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보좌를 버린 낮은 자의 음성을 쫓는 절대의 추종을 위해 길떠나기를 멈추지 않는 평생의 에덴시학의 길은 이처럼 꿇어 엎디어 철저히 낮아지고 그러기에 더욱 의지할 곳이 없어서 철저히 말씀을 기다려 말씀을 전하는 연구자의 길이다.
빛과 소금이 되어 가기를 희망하는 복종한 자의 음향리듬이다. 섬기는 자가 되어 간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섬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기에 섬기는 자가 되는 나비야 청산가자를 부른다.  연단되어지는 음성을 가지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 사랑하게 되기 위하여 그 분이 있는 곳을 향한다. 그러기에 평생  메추리기와 만나를 먹이시는 자를 체험한 목회자로서의 기쁨의 목소리가 있다. 갈증 날 때 반석을 열어 주시는 물을 먹는 자,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자의 말씀을 듣고 보는 행복함이 있는 목소리로 삶을 살며 연구하며 비평가가 된다. 이 음성은 태극에 소리가 된다.


3. 빠알간 사랑의 소리

일반적이지 않는 시인의 사랑 원형질은 부끄러움이다. 자신을 돌아보아 그것은 오랜 기다림을 보고 허락하신 절대자에 대해 감격하며 자신을 낮게 낮추고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신앙영웅의 그 분 따라가기의 절대성이다.

가능성, 고향(3). 꽃댕기, 꽃송이, 꽁트, 건강, 겨드랑, 금붕어, 끝정, 기고만장, 노랑나비, 눈망울, 단명, 달랑거리는, 은방울, 돌기둥, 막상, 매양, 두 송이, 물레방아, 박동, 발등(3), 백운동, 버들강아, 봄신명, 복종(2), 백마강, 부동(2), 부정(2), 분명, 불가항력, 비명(2), 비상(2), 빈깡통, 모양, 모퉁이, 목청(2), 무궁한(2), 무명의(2), 무명초, 무성, 무쇠기둥, 무중력, 몸뚱이, 몇송이, 물레벙아(2) 사랑(9), 산신령, 산등, 산중문답, 산정(4). 소망(2),소망(2), 서성이더니, 서성이고, 서정시, 석양, 세상, 세 송이, 수통, 순정, 순응하는, 스승, 시장(3) 싱그러운, 심장, 아카시아 향, 악몽, 안녕, 앞마당, 애당초, 열병, 영혼, 옥주봉, 온종일(2), 욕망(3), 원망(2), 원숭이, 음정, 인생, 일상, 인수봉, 일정, 요단강, 자랑, 지하봉, 정, 군봉, 저승, 절망(7). 조갈증, 진동(3), 지상(5), 지층, 지팡이(3), 진창, 치정(3), 천하명산대회, 천황봉, 초롱한, 앞마당, 찌렁한, 전생, 욕망(3), 청사초롱, 타성, 태양, 투명한(5), 팔각정(2), 포등한, 피등한, 한송이, 한강, 한강가, 햇덩이, 호롱불, 화강암(4), 팔각정(2), 포등한, 피등한, 한송이, 한강, 한강가, 햇덩이, 호롱불, 화강암(4), 화창, 환상(2), 환성, 허영, 혈기왕성, 혈통, 현명, 휘황.

시의 언어에서 메타퍼 ‘사랑’ 언어는 이차적 언어이다. 홍시인에게 사랑 언어는 사랑의 직설성이 아니라 가장 부끄러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부끄러움은 일찍이 헌화가에서 실명노인이 부끄러워아니한다면 꽃을 꺾어드리겠다는 사랑시를 고백함과 같다. 
홍문표 학자가 시를 통해 신앙영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것은 그토록 평생의 철학으로 하는 에덴시학이 시집 『나비야 청산가자』에 찾아진다. 길떠나기의 결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이 된.그리하여 입도 벙어리가 되고 귀도 들리지 아니하여 불순종했던 시기, 그러나 이제 입이 열리며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가는 사랑의 은혜적 음향리듬을 듣기 때문이다. 바울이 3년간 아멘을 준비한 거나 모세가 40년동안 아멘을 준비한 것이나 사가랴가 불순종으로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된 상황에서 아멘을 준비한 것처럼 다시 한 번 기회가 온다면 지체없이 순종하고 찬양하고 기쁨으로 맞이하리라는 역사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시대의 요청에 따라 행동하는 에덴시학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홍문표의 나비야 청산가자는 광야, 산에서 얻는 은혜를 감동하는 음향리듬으로 울려퍼진다. 신기함의 일상과 충족과 연단과 고난을 통하여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떠나는 시인의 현재이다. 이 길은 같이 어우러져야 함을 주제로 하는데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가자이다. 시어의 음향리듬을 통하여 실제의 울림소리는 청산이라고 하는 색체의식과 더불어 시적텍스트다움으로서의 현실성은 와병의식으로 인한 하향의식을 양진하려 부여군 내산면에 밤매실농원경영으로 유기농산물을 생산한다.
때로는 그냥 나누어 주기도 하는 청정 유기농산물은 푸른 청산을 색체리듬으로 선택한 결과에서 오는 와병 불면의 쾌유와 더불어 사랑의 음향리듬이 된다.

산/산=눈물/눈물/눈물/눈물
산/산=믿음/믿음/믿음/믿음
산/산=당신/당신/당신/당신   
산/산=우리/우리/우리/우리
산/산=평화/평화/평화/평화
산/산=노래/노래/노래/노래
산/ 산/ 산/ 산/ 산/ 산             
- 홍문표 시  「산이 산인 것처럼」의 리듬

산이 기호학으로 보여주는 바의 비잉 둘러 싸임 안에는 홍문표가 추구하는 우리와 평화와 노래가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비워낸 사랑의 음향이 살아온 삶의 음향으로 울리고 미래를 향한 시인의 소고가 ‘눈물’과 ‘믿음’과 ‘당신’과 ‘우리’와 ‘평화’와 ‘노래’의 음향리듬은 저 높고 푸른 ‘산’ 색채리듬을 향하여 놓여  진다.
이 절대의 이상향은 시적 육성으로 18회의 시적화자목소리이다. 이 ‘산’은 ‘눈물’과 ‘믿음’과 ‘당신’과 ‘우리’와 ‘평화’와 ‘노래’를 네 모 안에 하나님이 보호하고 있음을 암시이다. 네 모는 자연에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성역이다. 이 네 모는 완전지향성의 은유이다. 홍문표는 이 곳을 최고의 지점으로 한다.

높이 오를수록
멀리 보이고
높이 오를수록
내려다 보이고
높이 오를수록 하늘 복판
낮에는 불수레로 우주를 달리고
밤에는
은하수 넘실대는 아슬한 강가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가슴에 달고
어둠을 굽어보는 짜릿한 평화,
그래서 날마다 산에 오르고
할 수만 있으면
병벽의 정수리
새하얀 에베레스트 영봉에
내 오른 손의 빨간 손수건 하나
펄럭이고 싶었지
정상이 무엇인지
깃발이 무엇인지
그 펄럭이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런데 요즈음은
오를수록 희미하게 보이고
오를수록 숨이차고
차라리 낮은 계곡
강가에 흔들리는 버들강아지
발밑에 깔리는 조약돌 하나
그도 아니면
물결따라 흔들리는 갈대꽃
산 그림자
- 「날마다 산에 올라」7

홍시인이 가지는 신앙영웅신화의 결정타는 ‘반짝이는 별들을 가슴에 달고/ 어둠을 굽어보는 짜릿한 평화’라는 것이다. 어둠을 이기려는 마음, 그 절대의 경지까지 울리는 음향리듬을 소유하는 시적 화자에서이다. 이 색채는 빠알간 색채리듬이다.
이 빨간 사랑의 리듬은 흰색으로 돌출되어 고난을 기뻐하는 음성이 된다.

해발 오천을 넘은 영봉은
이미 청산이 아니다.
에베레스트나
몸울랑이나
킬리만자로나
맥귄리의 정수리
거기엔 소나무도 없고
산나리도 없고
범나비도 없다.
억년빙설로 무장한
장엄한 침묵
거기엔 은빛 권력과
바람의 항거와
산들의 질투가 있을 뿐이다.
흰구름마저 오르다 지쳐
허리춤에서 흩어지는
저 아득한 봉우리
얼굴조차 가늠키 어령누
이승의 먼 거리에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들의 구구한 넋두리도
눈물도 한숨도
미움도 사랑도 없는
그리하여
죽음조차 빙벽의 아득한 두려움으로
가리워진 새하얀 나라일 뿐이다
- 홍문표 「새하얀 나라」


홍문표의 신앙영웅의 기질은 그분의 세계에 대한 하얀 의식이다. 홍문표에게 있어서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며, 고민은 더 이상 고민이 될 수 없다. 요셉은 그의 약혼녀 마리아를 사랑함으로 만삭된 마리아를 수 천리 데리고 가서 보호한다. 사랑하는 자의 음성으로 가정을 보호하자 사랑하는 자의 음성이 들어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에게 전하노라”를 듣는다.
사랑하는 자가 나를 위해 믿음의 빛을 전해주시기에 에덴을 향한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영혼이 곤할 때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다닐 길을 알게 하시고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시기에 전율하며 하나님을 향해 길 떠나기 ‘나비야 청산가자’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의 관계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홍문표의 삶은 단순히 새싹과 같은 순서로 시작되어 늙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할 때에 장구하게 단 날 히브리어 얌임동안의 삶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 한 하나님의 자손이 왕위에 앉는 여러 날 얌임 동안 사는 날이다. 장수하는 오늘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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