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폭포수 아 갚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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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폭포수 아 갚아

사랑아 사랑아 49
 
  사랑 믿음 소망 – 고전 13: 13
  사랑폭포수 아 갚아 (20140824) 李英芝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받은 사랑을  아 갚아 야지 하고 감탄하면서 갚아 가게 됩니다. 저는 먼저 사랑을 받은 감격을 다음과 같이 시조로 작품화하였습니다.

폭포수 앞이에요
하아얀 물보라가 입으로 가슴으로
눈으로 들이미는
얼결에 시원하게 뻥 뚫리는 날에요

폭포수 바람에요
커다란 몸집으로 가슴을 흔들면서
살아서 눈 뜨이는
정갈한 비움이에요 나를 씻는 날에요

폭포수 소리에요
어떠한 다른소리 하나도 들리잖고
나는 널 사랑한다
나만을 믿으라하며 등두드리는 날에요


사랑 의미의 히브리어 발음은  아파 입니다. 이  아파 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쓰는  아파  발음과 같습니다. 가슴이 아플만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대상을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너가 나의 안에 있고 내가 너 안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가장 대표적인 다윋의 끓는 가슴의 몸짓을 로버트(J. J. M. Roberts)는 오베드 에돔에게서 다윋에게로 온(삼하 6: 10 17) 법궤 이동과 기름 부어서  봐 맺은 인  바이메쇠후 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윋을 승리자로 만든 이유는 다윋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 마음이어서입니다.

1). 사랑 정의 찾기

  (1). 다윋 이름과 같은 사랑의 의미

솔로몬이 아가서를 지은 관계로 하여 솔로몬과 사랑이야기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상대방을 사랑하는 뜻이 다윋 언어자체서 발견됩니다.

① 도데하 ② 네 사랑이  도데하  ③ 나의 사랑하는 자는  도디  ④ 나의 사랑하는 자가  도디  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도디  ⑥ 나의 사랑하는 자가  도디  ⑦ 나의 사랑하는 자요  도디  ⑧ 나의 사랑하는 자는  도디  ⑨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도딤  ⑩ 나의 사랑하는 자의  도디  ⑪ 나의 사랑하는 자야  도디  ⑫ 나의 사랑하는 자를, 합환체  도디  ⑬ 내가  베도디  ⑭ 나의 사랑하는 자는  베도디  ⑮ 나의 사랑하는 자야  도디  ⑯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도디  ⑰ 너의 사랑하는 자가  도데헤  ⑱ 너의 사랑하는 자가  도데헤  ⑲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미도드  ⑳ 그 사랑하는 자를  도다아 

(2).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히브리어의 그로부터 온 물 󰗫(마 물)에서 나타납니다.

사랑스럽구나  마함담

이 물 접두어로 된  마함딤에서는 히브리어 물 언어가 3회나 반복되었습니다.

(3). 사랑의 목적

사람은 사랑을 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 사랑은 성경언어에서 가슴과 가슴끼리 바라보는 형상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레도디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레도디

가슴이 존재하는 것은 사랑하기 위하여서임을  레도디 언어에서  레 가 목적성을 의미하고  레도 의  오 는 가슴 사이관계를 형상하는  도드 로 하여 서로 가슴에서 돋아남을 바라보는 형상입니다.
 
(4). 하나님 안에서 숨 쉬어야 진정한 사랑

희안하게도 우리나라의  아프다 라는 말은 히브리어 발음  아프다와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숨 쉼이어서입니다.

(5). 헤어짐의 뜻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

헤어짐의 의미는 내가 하나님 안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야  쉐아하바아
사랑하는 자를  쉐아아하바아 

 쉐아아하바아 는  아파아 라는 언어에 앞에  쉐 가 붙어 사랑을 분쇄해버린 상태입니다. 이 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합니다.

(6). 사랑은 머리와 눈 안에 하나님이 들어있는 삶

내 사랑아  라야티  내 사랑  라야아티  내 사랑아  라야아티  나의 사랑  라야티
 
사랑은 머리와 눈 안에 하나님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과 마음이 통합니다.

(7). 사랑은 나의 전부를 주는 것

전부의 사랑주리라  에텐 에트 도다이 라크 

2). 사랑

사랑 의미는 십일조 의미와 같습니다. 전체를 바치지만 그 중에서 아홉을 도로 얻는 것입니다.

(1).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은 아파  아하바  관계입니다.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마음으로 하여 백합화의 순결한 사랑 관계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마음에 돋아  도다  향기가 향품보다 승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은  아파 함으로 질투가 강해(아 8: 6) 하 아파  하 아하바아  터져나오는 분수입니다. 헬라어 발음도  헤 아파페 로 율법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사랑해 더 아 갚어  헤 데 아가페 가 되는 그래서 덕을 세웁니다. 사랑해 아 갚어  헤 아가페 는 오래 참으며 사랑해 아 갚어  헤 아가페 합니다.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는 사랑해 아 갚어  헤 아가페 는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옳지 아 갚어  오티 아가페 하는 사랑하는 자들의  우리가 사랑하자 아 갚았다이  아가페토이 , 아 갚으면  아가푸멘 이라 외치는 이 특유의 인생살이법은 사랑해 아 갚어  헤 아가페  나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아 갚을구먼  헤 아가페카멘 하는 신념이 들어 있습니다.
 
(2). 사랑이

모든 것 중에 사랑이 선택되는 이유는 사랑이 삶을 지탱해주는 근원이 되며 이 삶의 연속은 사랑이 돋아  돋아하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이  돋아 하 나는 사랑의 묘미는 따라가게 하고 즐겁고 기쁘게 합니다. 가슴 깊이 서로  아파 하며 아름답게 돋아  아 갚은  마음의 흡족을 줍니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해가 펴서  헤가페사스  갚아나갑니다. 사랑해  갚아가는 마음은 갚는 보답으로 하여 공동생활에서 넉넉히 갚게 된 이야기로 넘칩니다. 그로하여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죽게 도기도 하는 일이 길러집니다.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오는 일을 아 갚아  아가페 나가는 마음입니다. 더 아 갚아  테 아가페  온전히 지키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 갚는  일은 남을 도우며 아 갚아 가는 날의 감탄입니다. 그러기에 이 갚아 그리고 갚으면서 또 갚아 갈 일에 가슴 부푸는 일로 하여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을 늘 갚아 나가는 생활이 있어서입니다.

(3).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은 늘 우리들을 향하여 아파  아파아 하시었기에 이 사랑을 받는 자는 항상 아 아파  하아파아  오 그 사랑아 여기있다하면서 절대자를 간절히 찾는 자가 됩니다. 이때 사랑은 아파  아파아 가 3회나  아파 오 아파아 에 아파 합니다. 이 때 특징은 정직입니다. 그렇습니다. 예 아파요 하는 이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 주는 마음의 소리 아파입니다.  사랑으로 감 아파이지요. 
철저히 하나님 계명을 지키며 갚은 생활로 갚은 결과는 아 갚아요로 대답까지 가능합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사랑을 가졌을 때는 전체의 목표 아 갚겠수 선서까지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갚은 일의 보답입니다. 드디어는 이 사랑을  아 갚았더니  아 갚은 의 삶이 됩니다.  갚은  사이는 먼저 갚으마의 약속이 이루어진 사이어서 그 안에 주 예수 안에서의 사랑으로 갚은 사이가 됩니다. 이 때문에 신과 인간사이까지 그 관계가 확대된 신이 사랑을 갚으신 경지까지 가게 되고 그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항상 생각하며 큰 사랑을  아 갚은  일의 진행이 그리스도 사랑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서로  아 갚겠다 는 마음을 다짐하는 삶이 됩니다.   
사랑표시  갚겠소  말을 듣거나 그렇게 느끼는 우리는 현재형의 사랑을  아 갚는  마음을 품어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늘 들어  아 갚는  마음이 된 일입니다. 이  아 갚는  일은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현재형  아 갚는  생활입니다. 사랑의 온전한 띠로 매는 사랑은  아 갚도다 의 현재입니다. 이 마음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사랑을 갚는일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여기있소하시었기에 일어나는 마음이  아 갚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경지는  아 갚어 의 명령 그대로 복창하는일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내 안에 거하시는 일입니다. 

(4). 사랑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에게 무궁한 사랑을 가지시어서 늘 베 아파 하시었습니다. 아 부탁해 아 갚아 의 관계형성은 아가페사랑입니다. 오직 사랑  디아 테스 아가페스 로 서로 종노릇 해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사랑으로 열매 맺는 일의  예뻐 아 갚어 하며 서로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5). 사랑함으로

믿는 사람들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서로 사랑 가슴이 돋아납니다. 사랑을 봐 아픔이 있고 또 확인하는 하나님 백성들은 기뻐 뛰며 즐거워하며 희락하는 형제 사랑을 가집니다. 하나님 뜻이 가장 담겨져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사망에서 옮겨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후(19장) 부활(20장)하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를 3회나 반복하시었습니다. 사랑이 가득 든 사랑함은 아브라함의 아비라 함의 함입니다. 이 함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6). 사랑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그들을 사랑하여 바라보며 마음을 보여주며 봐 아팠던  바아오하베투  마음이라 하시었습니다. 그 결과는 애굽에서 출 애굽시키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하시어 베아프다 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중요성을 실제 성경은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하는 일을 봐 예 아파라 했고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였을 때는 아파라 하였으며 요나단이 다윋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 할 때는 베아팠도다 라 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사랑이 강조되지요.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야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요한의 사랑장입니다.

 사랑장 요한복음
요한 복음은 사랑을 전제로 예수님과 요한(1장) 가나안 혼인 잔치에 물이 포도주로 되는 다시 거듭나는 의미(2장)와 예수님과 나사로 두 사람의 의미를 거듭나는 문제(3장)로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을 통한 거듭남의 문제(4장)를 베데스다 연못(5장)의 물로 하고 오병이어(6장)와 초막절이 뜻하는 생명과 할례와 교육을 통하여(7장) 빚진 자의 후손(8장)은 소경이 눈을 뜨게(9장)해야 하는 임무로 선한목자(10장)를 듭니다.
나사로의 눈물(11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12장)하여 세족식(13장)을 행하심과 같이 다시 살아나게 하시어 씻어집니다. 예수님은 고별설교(14장)로 헤어짐 기간이 있을지라도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붙어 있어야(15장)한다 하시면서 보혜사 약속(16장), 중보기도(17장)를 하시는 따뜻한 사랑 실천 후 기드론 골짜기에서 빌라도의 분명하지 않는 행보 속에서 체포(18장)되십니다.
십자가 후(19장) 부활(20장)하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를 3회나 반복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짐하시며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마음이 아픈 상태를 말합니다. 

요한복음장에서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다양한 대상을 그 대상보다 더 먼저 사랑하여 고쳐 주시는 일이 전개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에서 찾아집니다. 원래 사래의 이름은 사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그에게서 낳게 하실 계획이시면서 사라라는 이름을 사래로 바뀌게 하시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살아  사라 라는 말이 있고 기본형은  살다 이고 이  살다 는 전성명사형으로는  사람 이고 이를 연결어미로서 하여  사랑 이 있습니다. 살아있음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어서 살아있는 사랑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여호와 히브리어에서 어근을 하야로 합니다. 양쪽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숨을 쉬게 하는 숨 쉼, 곧 이 생명은 인간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여 마음껏 즐기는 은총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소유격으로 하여  나의 그이 로 하고 나의 사랑하는 대상은 남자 단수인데 나의 가슴에 돋아 있는 즉 나의 가슴에 들어있는 마음이 가리키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 사랑하는 자는 가슴에 무엇이  돋아  나는 건데 모두 2회(아 5: 6, 6: 3)로 하여 혼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뵈 돋아 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는  레도디 입니다.
이별은 흔히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짐인데 이 이별을 성경은 거리에서 만나지 못하는 나의 사랑하는 자, 우리나랏말에서 있는 쉬어, 맛이 간 뜻의 발음이 글자 처음에 오는  쉐아하바 로 합니다. 시어 버린 것은 아무짝에도 먹을 수 없습니다.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아 3: 2)하는 이 문법은 동사로 여성 3인칭 단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님이 드러나는 이 사랑하는 자 곧 아픔이 쉬어버린  쉐아아바 는 다름 아닌  안 이 구성되지 않는, 내가 숨 쉬는 곳을 잃어버린 여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안에 들어 있지 않는 대상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며 사랑을 분쉐해 버려진 자입니다. 가슴에 사랑을 갖고 있지 않는 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 있지 않거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에 사랑은 찾을 수 없습니다. 
4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을 프라이는 회복성에서 절대조건인 예수님 한 분으로 정의하였다.
 
 프라이의 그에 대한 이미지
   
divine  world    One God
human world  One Man
animal world    One Lamb
vegetable world  One Tree(of Life)
mineral world  One Bulding, Temple, water

지상에서의 하나님이 곧 예수님임을 성경은 창세기 1:1 2:3절까지와 2:4절을 분리하면서 창세기 첫 장부터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33세  엘로힘 33회째

33회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신 동안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에서 엘로힘이 33회(창 1:1 2:2) 있습니다.
 
창세기(1:1 2:3)에서의 엘로힘 33회)]

(1)하나님이 (2)하나님의 (3)하나님이 (4)하나님의 (5)하나님이 (6)하나님이 (7)하나님이 (8)하나님이 (9)하나님이 (10)하나님이 (11)하나님이 (12)하나님의 (13)하나님이 (14)하나님의 (15) 하나님이 (16)하나님이 (17)하나님이 (18)하나님의 (19)하나님이 (20)하나님이 (21)하나님이 (22)하나님의 (23)하나님이 (24)하나님이 (25)하나님이 (26)하나님의 (27)하나님이 (28)하나님이 (29) 하나님의 (30)하나님이 (31)하나님이 (32)하나님의 (33)하나님이

과연 엘로힘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구약 창세기가 보여주는 예수님 33세에 맞게 첫 장부터 2장 2절까지 하나님 곧 엘로힘을 33회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알고파 하는 힘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우리말 그대로 781회나 아가리로 표시합니다. 왜 그러토록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먹히시는데 있습니다. 아가리이 9회 오켈 42회 오클라 19회  아킬라 1회 등 총 843회나 우리가 말하는 아카리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예수님의 몸체가 먹히시는 이 값어치는 너희가 먹을찌니라 먹이시며 저희에게 먹이며 등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먹이시도록 하시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다음에서 더욱 확실해집니다.

1. 예수님 자리연보

예수님 자리는 족보로 14대에서 다시 14대로 그리고 다시 14대의 그리스도 자리 전의 13대에 있습니다. 바로 뒷 14대에서는 그리스도(마 1:17)가 있습니다.

신약 기록의 예수님 족보(아브라함  다윋까지 14대)
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② 아브라함이 낳음, 웃음, 이삭
③ 이삭이 낳음, 발꿈치, 반석, 야곱
④ 야곱이 낳음, 실존 소망, 유다
⑤ 유다가 낳음, 떠오름, 베레스
⑥ 르우벤이 낳음, 뜰, 마당, 헤스론
⑦ 헤스론이 낳음, 높음, 람
⑧ 람이 낳음, 자원하는 백성, 아미나답 
⑨ 아미나다브가 낳음, 경험으로 배운,
⑩ 나손이 낳음, 옷 입음, 살몬
⑪ 살몬이 낳음, 기둥, 보아스 
⑫ 보아즈가 낳음, 섬기는 것, 오벳
⑬ 오베드가 낳음, 다윋의 아버지,이새
⑭ 이새가 낳음, 끓는 가슴, 다스리다, 다윋               
 아브라함에서 다윋까지 14대(마 1: 2 1: 6)

아브라함에서 다윋까지의 계보입니다. 신약의 기록에서 보는 아브라함  다윋까지의 7의 반복 리듬자리입니다.
다음은 다시 이어지는 성경에서의 14회의 자리입니다.

 신약 기록의 예수님 족보((솔로몬  여고냐까지 14대)
① 다윋이 낳음, 평화로운, 솔로몬
② 솔로몬이 낳음, 백성의 넓힘, 르호보암 
③ 르호보암이 낳음 아들, 실존을 소망하는 양육 아비야
④ 아비야가 낳음 아들, 치료, 아사 
⑤ 아사가 낳음, 판결자, 여호사밧
⑥ 여호사밧이 낳음, 여호와께서 높이심, 요람
⑦ 요람이 낳음, 여호와의 위엄, 웃시야
⑧ 웃시아가 낳음, 여호와는 완전하심, 요담
⑨ 요담이 낳음, 기업, 아하스
⑩ 아하스가 낳음, 여호와로 강해짐, 주의 강하심, 히스기야
⑪ 히스기야가 낳음, 망각, 므낫세
⑫ 므낫세가 낳음, 확고한, 아몬
⑬ 아몬의 아들, 여호와께서 기초를 두심, 요시아
⑭ 여호와께서 세우심, 여고냐
                솔로몬에서 여고냐까지(마 1: 6 1: 11)

일곱 날 째에 군대가 만들어지면서(창 2: 1) 예수자리는 41회째이입니다.

신약 기록의 예수님 족보(스알디엘  그리스도까지 14대)
  ① 여고냐가 낳음, 주께 간구, 스알디엘
  ② 스알디엘이 낳음, 혼합되어 황폐해짐, 스룹바벨 
  ③ 스룹바벨이 낳음, 영광스럽게 양육함, 아비훗 
  ④ 아비훗이 낳음, 일어남의 하나님, 일어섬의 전능자, 엘리야김 
  ⑤ 엘리야김이 낳음, 도움, 아소르
  ⑥ 아소르가 낳음, 의로움, 사독
  ⑦ 사독이 낳음, 실존을 소망하여 일어섬, 아킴
  ⑧ 아킴이 낳음, 위엄 있는 전능자, 엘리옷
  ⑨ 엘리훗이 낳음, 하나님은 돕는 자, 엘르아살
  ⑩ 엘르아살이 낳음, 선물, 맛단
  ⑪ 맛단이 낳음, 발꿈치,   
  ⑫ 야곱이 낳음, 더하고 더하다, 요셉   
  ⑬ 요셉이 낳음, 여호와께서 구원하심, 예수
  ⑭ 그리스도 ! Χριστοῡ, 
 바벨론이거에서 그리스도까지(제사장 사독스알디알에서 그리스도까지)

신약에서 회자되는 예수님의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 34)와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니는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와에 대한 히브리 원에서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 22:1)에 대하여 프레데릭은 시편에서 말합니다.
히브리어 아자브는 예수님 십자가사건의 극형을 강한 의미, 곧 옛 근원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서로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지만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ni 입니다. 우리들은 사람을 말 할 때에 오는이 곧 오느니로 발음되는 점이다. 예수의 구약적 예언과 신약의 그대로 이루어 진 이의 이  니 는 곧 나를 뜻하는 예수지칭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번역하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신약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번역하면 오 데오스 무 오 데오스 무, 에이스 티 에파텔리페스 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가라 하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 22:1는 이미 다윋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한 구약에서의 부르짖음입니다. 시적 은유 두 번째의 자리, 부활의 자리입니다. 다윋이 절대적인 은혜를 구하여 예수님의 조상이 된 은혜를 받은 일입니다. 성경은 다윋의 자손 예수라 합니다. 

① (다윋의 시, 영장으로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 1)
②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 2)
③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 46)
④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3)이다.

구약의 발음과 신약의 발음의 차이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와 그리고 헬라어  데 무 데 무 이나티 메 엘카델리페스 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의 발음 차이는 히브리어를 헬라어  오 데오스 무 오 데오스 무, 에이스 티 에파텔리페스 메 와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로 하면서 결정적 차이를 히브리어  아자브타니 와 헬라어  사박다니 와 헬라어  사박다니 로 합니다. 이  사박다니  헬라에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똑 같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  버리셨나이까 라는 과거형을 씁니다. 즉 이미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버려졌다는 의미와 배반 의미까지 덧붙여집니다. 그대로 직역해 본다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셨나이까 입니다. 
우리말에  자빠졌다, 자빠트리니, 자빠졌다  라는 말이 있듯이 히브리어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의  아자브타니 는  버리셨다 의 스트롱번호 완료형(내가 너를 버렸다, 배반했다)입니다. 기본형  아 자브 의 다양한 변형에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뜻은  버려졌다 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완전한 분리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서 하나님이 원어상으로는 배반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4. 지금도 일하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모습을 언어 말미에 알렙 창 1:1 2:3과  라메드 창 1: 1 2: 3)에서 반복 리듬으로 합니다. 

* 표32 1: 창세기(1:1 2:3)에서의 ....ל...라멧) 41회

 (1)  빛을 위하여 (2)  어둠을 위하여 위하여  (3)  물을 위하여  (4)  궁창을 위하여 (5)  궁창을 위하여  (6)  궁창을 위하여 (7)  뭍을 위하여 (8)  그리고 일어서기 위하여 (9)    각기 종류를 위하여 (10)    각기 종류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옴을 위해 (11)    각기 종류를 위하여 (12)  나누기위하여 (13)  목표를 위해 (14)  모이기위하여 (15)  일자를 위하여 (16)  광명을 위하여 (17)  비취기 위하여 (18)  목표로 하시기 위하여 (19)  주관을 목표로 하시기 위하여 (20)  비취게 하시기 위하여 (21)  그리고 주관하시려고 (22)  그리고 나뉘게 하시려고 (23)  그 종류를 위하여 (24)    그 종류를 위하여 (25)  말씀하시려고 (26)  그 종류를 위하여, 그녀의 분깃을 위하여 (27)  그 종류를 위하여, 그녀의 분깃을 위하여 (28)  그 종류를 위하여, 그녀의 분깃을 위하여 (29)  그 종류를 위하여, 그녀의 분깃을 위하여 (30)  하나님의 분깃을 위하여 (31)  그들을 위하여 (32)  너희들을 위하여 (33)  너희들을 위하여 (34)  식물을 위하여, 먹이를 위하여 (35)  또 모든 것을 위하여 (36)  또 모든 것을 위하여 (37)  모든 것을 위하여 (38)  먹이를 위하여 (39)  그 일을 위하여 (40)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41)  만듦의 완성, 목표를 행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자리인 예수님의 자리는 41자리이고 그리스도의 자리는 42회로 되는바 바로 예수의 족보자리를 41회로 하고 있음과 시적 하이퍼성으로 연결됩니다.

창세기(1:1 2:3)에서의  알레프 22회

 (1)  창조하시니라 바라 (2)  보시기에 바이라 (3)  칭하시고 바이크라 (4)  칭하시니라 카라 (5)  칭하시니라 바이크라 (6)  이라 칭하시고 바이크라 (7)  라 칭하시니라 카라 (8)  내라 타드세아 (9)    풀과 데쉐아 (10)    내니 바토제아 (11)    보시기에 바야르아 (13)  보시기에 바야르아 (14)  보시기에 바야르아 (15)  보시기에 바이브라 (16)  충만하라 말레 (17)  내라 베토제아 (18)  창조하시되 바이브라 (19)  창조하시되 바라 (20)  창조하시고 바라 (21)  충만하라 말라 (22)  보시니 바야르아

알레프는 배우는 익히는 의미로 의미의 내면구조로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사람이나 모든 생물이 살아 있게 하시는  현재진형으로 합니다. 보게 하시는 진행형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숨 쉼을 사람들이 일을 하며 그리고 잠을 자며 사랑을 하면서 연구를 하는 일에서 보입니다. 진행형 알레프 상태가 성경히브리어 단어 끝에 놓여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상징자리 41회는 예수님의 뚜렷한 목적인 빛을 위하여로 시작합니다. 그 완성을 위하여언어 표시로 끝을 맺는 목적은 예수를 들어냄에 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라메드로 총 41회는 14대와 14대 다음의 13대에서 예수님의 계보 41(마 1: 2 1: 16)대째로 예수님 자리입니다. 신구약이 이어지는 지속되는 14의의 중요성은  정월 십사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며 완전수 7의 2배수인 14대와 14대와 14대로서 두 번째 자리의 중요성인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자리입니다.
 
5. 예수님 이야기

 1). 청년 예수님에 대한 영화이야기

영화제작자들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시는 장면을 보냅니다. 왕권 문제(삼상 8: 10 19)와 관련한 예수님이  그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마 6: 10; 눅 11: 12)를 실행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을 『나사렛 예수』(1977)영화에서 보인 사복음서의 치유 축복 가르침 기적을 보여주면서도 예수님 체포사건이지만 예수님은 평온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1988년 열린 시티 오브 엔젤스 영화는  거룩함을 좇아서 이다. 『몬트리올 예수』(1988)  『사도』(1977) 모두 예수님의 사명을 다룬다. 『몬트리올 예수』의 주인공 대니엘은 예수 역을 담당하느라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십자가가 넘어져서 실제 주인공이 죽는 일화를 남겼습니다. 『사도』영화는 구원을 받은 자의 소명 이야기로 공동 목회자에게 과거 고백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몰래 나누어주는 모습으로 과거 청산을 오보랩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영화는 주제이건 소재이건 관계없이 오늘날도 계속된다. 열광의 이유는 예수님의 몸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일이 영화 제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과학적으로 물은 생명과 관련한 일차적인 연관성에서 찾아집니다. 수정란 때 99% 갖 태어났을 때 90% 완전히 성장하면 70% 죽을 때는 물이 약 50%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에스겔골짜기의 마른 뼈가 살아나시는 일 예표(겔 37: 3, 7)는 영원한 감동입니다.
예수님의 매력은 지상에서의 일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여 하나님 일을 하신데 있다.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신 26: 16)라는 명령은 가난한 여인 전란 후 특히 우리나라 여성의 극심한 가난과 그녀들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일을 사랑 실천합니다.
청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절규는  다윋이 여호와를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던 말과 같습니다.  어찌하여 의 외침은 베드로가 말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와 예수님의 사랑 실천 영화 『쿼바디스』와 연결됩니다. 노벨 문학 수상 작품이기도 한 51년 영화 『쿼바디스』는 베드로가 남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를 의미화 한  쿼바디스 는 폴란드 영화 역사상 최대 규모인 1,800 달러의 제작비가 투자와 성원하에 제작되었습니다. 예르지 카발레로비치 감독 출연 막달레나 미엘 카르즈 라팔 쿠박키 보구슬라프 린다 안드레이 토멕키 미샬 바요르로 출연작품으로 이루어진 영화입니다.  비니키우스는 로마시대 소아시아(현재 터키)에서의 전쟁에서 승리 후 로마 장교 삼촌 페트로니우스의 집에 도착한 곳에서 비니키우스는 소국 공주 리기아에게 한 눈에 반해 삼촌에게 도움을 청한다. 페트로니우스는 조카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풀라우치우스의 집을 방문할 것을 제안합니다. 비니키우스와 리기아는 정원에서 만나면서 막대기로 모래에 물고기를 그려 자신은 기독교인임을 알려줍니다. 미모 때문에 정신이 팔려 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며칠 뒤 리기아는 근위병에 이끌려 황제의 궁에 오게 됩니다. 네로의 옛 첩이었던 악트가 황제가 여는 연회에 리기아를 단장시켜 내 보내는데 이때 술에 취한 비니키우스가 그녀에게 닥아오자 그녀의 믿음직한 노예 우르수스가 구해줍니다. 비니키우스는 연회장에 남겨지고 이런 와중에 로마황제의 불 사건을 황제 네로는 크리스천인들에게 그 죄로 돌린 대대적인 크리스천 도살이 사건 현장에서 리기와와 비니키우스는 죽음의 위기에 봉착하지만 결국 목숨은 구해지면서 시칠리아로 떠납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칠리아로 떠날 것을 거절하고 쿼바디스 도미네를 외치며 로마로 순교의 발걸음을 옮깁니다. 나약한 여성이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남을 극대화하며 삶의 문제를 기독교인의 문제로 다룹니다. 『왕중왕』은 로마의 절대 권력아래 억압당한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죽음을 다룹니다.


2). 믿는 사람들의 징표

『쿼바디스』에서 리기아가 그려 보인 물고기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 명(4000 ~ 5000명)을 먹이고도 남은 사랑 나눔 실천입니다. 왜 세 마리나 또 다른 수의 물고기가 아니고 물고기 두 마리인가입니다. 
잌크튜스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다. 물고기는 눈(영속자)의 아들 여호수아의 의미와도 연관(대상 7: 27)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ÏΧθΥΣ로 Ϊησού(예수) χριστού(크리스토) θεός(에오스) ϒυίός(위오스) Σ의  약자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글자가 됩니다. 인간 물고기를 낚는 청년 예수는 하나님 사랑의 실천을 한 후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벤허』영화는 갈증을 심히 겪는 벤허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그가 물을 건넵니다. 사마리아 여인(요 4: 14, 15)에게도 예수님은 물과 말씀과 연결시킵니다. 사막을 통과할 때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해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사 48: 21)하시었습니다. 샘의 근원으로 인도(사 49: 10)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백성들을 목마르지 않게(계 7: 16) 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의 사랑의 실천은 영화장면들의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하나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성경 철학이다.이 물고기는 수로왕능에서도 발견됩니다.
성경은 중요한 사건이 전개될 때마다 눈과 물과 물동이와 잔을 등장시킨다. 모세는 일곱 처녀들의 물동이에 물을 길어주면서 십보라와 만납니다. 야곱은 우물가에 물동이를 들고 물 길으러 온 라헬을 만납니다. 라헬은 암양의미로 에브랏이 지닌 열매와 결실과 실과를 뜻합니다. 둘째 딸 라헬을 피에릭크(Ada. Feyerick)는 고대 상형문자와 관련된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목걸이와 관련하여 왕비 이미지로 해석하였습니다. 궁켈은 라헬과 베들레헴과의 연관성으로 라헬의 임신한 곳 에브랏(창 35: 16)과 관련하여 출산 의미를 지닌다 하였습니다.
유브라데 강(창 2: 14)과 연계되는 과실  열매의 개념 이스라엘의 분깃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집안인 벧 엘 베들레헴 떡집으로 하늘로부터 온 떡집 말씀과 관련됩니다. 입술의미여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는 입 그 입으로 말씀을 전한다. 물동이는 여성,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됩니다.
예수는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라 하십니다. 제자 중 둘을 보낸 두 명의 의미까지 더하는 이 물동이는 예수님의 잔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시내산 언약 사건은 언약을 주제로 시작으로 한 라헬 종족만이 참여했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출애굽 사건 직후 12족속으로 넓혀졌습니다. 
물두멍은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두멍의 물로 씻기를 지속하는 침례의 방법으로 죽기를 면(출 30: 20)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담는 물두멍 열을 만들어 좌편에 다섯과 우편에 다섯(대하 4: 6)을 두었으며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았다(출 40: 30). 물두멍은 거룩한 의미와 긴밀(출 40: 11)합니다. 
이 물두멍에 물이 담기는 일은 바다와 땅의 관계입니다. 여리고성과 달의 관계이다. 물그릇과 깊은 우물 속과  바다 속 더나아가 심연의 거대한 바다 깊이 심해(深海) 모두 물동이입니다. 더구나 바다 깊이 먹을 물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먹을 수 있는 좋은 물을 심해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이라 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우주관과 같다. 이 수직성의 거대한 깊이에 하나님의 거대한 빛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물로 죄를 속량하게 된다. 물에 대한 하나님의 거대한 익명성이며 타자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영적 물을 마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는 일이다. 물동이에 담기는 일이다. 물동이는 잔이다. 물의 깊이는 잔(Cup)에 있습니다. 물이나 우물(well)과의 동일성은  dying well (좋은 죽음)에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님 잔 안에 담기는 일은 하나님의 가슴에서 펑펑 쏟으시는 생명수를 마시는 일입니다. 이 깊이는 마치 미술가에서 발견되는 금방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젊음의 팔을 가진자에게 매달리는 일입니다. 이 사랑의 우물 깊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먹을 물을 먹이어 건져올립니다.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 만남에 우물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6시쯤 되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로 옵니다. 6시는 예수님 의미인 여섯째 날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사마리아 솨마리아는 야경  파수  망대  지키는 하늘바라기의 수직성인 눈과 관련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물 길러 오고, 그 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전 남편 다섯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윋 왕으로 비유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분도 남편이 아닌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여섯째 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시간은 제 6시쯤 되더라(요 4: 6)입니다. 다섯 째 날 동안을 거친 즉 구약 다음 신약의 여섯시의 예수님은 6째 날의 주인공입니다. 야곱의 우물(요 4: 6) 곁 6시쯤 정오 때는 하나님이 빛으로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죽지 않는 물 생명수를 마시게 하십니다. 곧 프락시스(praxis)의  제2의 스텝(the second step) 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 자신이 생명수라 하시었습니다. 곧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도(요 4: 28) 이 먹을 수 있는 물을 전하려 동네로 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은 소식으로 바뀝니다. 그녀는 하늘 위에 있는 물 즉 하늘의 우물을 깃는 기쁨입니다. 생명수를 얻는 여인의 기쁨,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때는 해가 가장 중앙에 있을 때입니다. 
다음은 이상시인의 『운동』시입니다.

1층우에있는2층우에있는3층우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남쪽을바라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밑에있는3층밑에있는2층밑에있는1층을내려간즉동쪽에서솟아오른태양이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시계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나보담은젊지않으나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보다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이상의 시「운동」

태양이 하늘 한 복판에 와 있을 때는 정오입니다. 시적 화자는 솟아 오른 태양을 숨도 쉬지 않고 찾아냅니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는 이 시는 3층까지 숨 가쁘게 올라갑니다. 마치 바울이 삼층천을 경험하였음과 같은 긴밀성입니다. 
다음은 태양이 하늘 중간에 있는 이상시의 예입니다.

동쪽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서쪽에 떨어지고
동쪽에서 솟아올라                            서쪽에 떨어지고
동쪽에서 솟아올라                            서쪽에 떨어지고
동쪽에서 솟아올라  하늘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고로 나는          시계를 내동댕이 쳐버리고 말았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시적화자는 숨가쁘게  1층우에있는2층우에있는3층우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  해를 갈망하며 하늘바라기의 문학을 탄생시킵니다.
우리나라에는  좋아라 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 쪼하르가 있습니다.  좋아라 는 오정이라는 뜻으로 태양이 정면에서 비칠 12시입니다.
이상 소설 『날개』는 정오에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았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때도 정오입니다. 빛을 바라 간절히 열망합니다.  노아는 하늘바라기로 지붕을 하늘로 향하게 문이 있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해는 하나님이 만들어 하늘에 다셨습니다. 우물의 여인이 눈으로 바라본 것은 빛입니다. 이 바라보는 눈은 샘 아인과 동일어입니다. 복음과의 연계성이 되는 말씀을 눈에 담은 다음 뱃속에 넣어 두었다가 입으로 전하였습니다. 
에모토는 물이 살아 있어서 사람의 말을 알아 듣는다하였습니다. 물에게 사랑의 말을 하면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에 의해 동적이미지를 전달됩니다.  물이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사건들을 전제로 한 신약의 그와 관련되어야 할 이유는 영적 계보가 바로 예수님이 6월절을 두 번 지나고 하나님의 제자가 유월절 준비를 어디서 할까요? 했을 때 물 한 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에게 물으라 하셨다에서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 준비의 경이로움은 예수님의 메시야 선포식이다. 예수님의 선포식에 쓰일 준비 과정의 물 한 동이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연결 고리입니다. 물 한 동이는 하나님의 피 흘림이 되는 회막과 단 사이에 놓이어 제단에서 사용(출 30: 28)된다. 물동이의 물은 정결하게 씻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속에 있는 물을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람의 삶과 죽음 또한 눈과 깊다. 죽으면 눈을 영원히 감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사람은 영이 살고 육이 쇠약하여 지면 영의 눈이 열립니다. 육신이 가라앉는 순간 희미하게 보이던 예수님이 보입니다. 평생 사모하여 기쁨으로 강(죽음)을 건넌다. 순간의 0.0001초 사이의 전과 후는 인간세계를 초극할 때 3차원에서 4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기쁨의 세계입니다. 영이 살아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죽음과 삶의 그 순간의 0.0001초 사이의 전후는 인간의 꿈이 남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진주 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지치고 낙망된 현실의 삶은 진주와 비교된 진주는 조개 안에 들어온 흙을 조개가 눈물로 감싸면서 만들어냅니다. 천국도 이와 관련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들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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