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보여주세요

홈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시론, 수필, 감상평 등과 일상적 이야기, 유머, 질문, 답변, 제안 등 형식이나 주제,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하며 향후 이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가슴으로 보여주세요

李英芝 0 1275
(1). 여호와여 어느때까지이니까 – 시편 13편
      가슴으로 보여주세요(20150208 이영지李英芝

해마다 2월이 되면 우리나라에는 고유의 명절이 있어서 고향을 찾으려 기차표 예매를 하게 된다. 다행히 예매표를 손에 쥔 타양살이들은 행운아가 되는 기분이다. 그런데 고향에 못가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야말로 나는 왜 고향에 못가는가라는 향수병에 결린다.
오늘 살펴볼 시편 13편은 처음부터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이니까”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간절하다 못하여 비통함을 드러내기 시작힌다. 그리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햐여 상대방을 사랑할 때 답답하고 그리고 자신의 초라함을 느낄 때 내가 언제까지 이러해야 하는가고 자문하게 된다.
이 어느때 까지이니까지라고 하는 이  ‘아드’ 어휘가  13편 처음에 놓인다.  이 ‘아드’는 발음 그대로 아들이다. 증거로 번역되어 있는 이 낱말은 신명기 6장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의 큰 글자 ‘증거 아드’로 되어 있다.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심을 나타낸다. 아들 삼아의 ‘아’ 아인으로 한다. 눈을 중요시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눈에 보이게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 다음 하나의 뜻인 ‘에하드’  곧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시다 할 때 이 하나를 강조한다. 그럼으로 하여 신자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눈에 보이게 해 주세요이다.
지금은 2월 명절 전 곧 세밑이다. 모두들 아련한 고향그리움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질 때이다. 그런데 고향에 못가는 심정을 성경언어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시작으로 할 수 있다.

요맘때 쯤이되면 고향이 가고 싶어
어느 때 언제쯤에 고향 땅 밟으리까
어느 때 까지이리까 눈으로도 보리까

설날이 내일모레 그리고 한 밤 자면
새싹이 나를 보려 나오려 하라는데
눈으로 보여주세요 당신가슴 그 안을

 1
시편 13절은 영장으로 한 다윗의 시이다. 이 때 한국말의 낯으로 연상되는 말이 나온다. 바로 ‘나자아’이다. 한국말의 속어 ‘낮짝’에 가깝다. 본문은 ‘라므나제아흐’이다. 시편 13편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의미 얼굴을 표시로 한다. 의미는 ‘영원한 향기가 나는 지붕안’이다. 이 안에 들어가고 싶은 거다. 다윗의 고집은 그대로 ‘고집하다, 인도하다’의 본뜻과 같다. .
그러므로 개인의 시라기 보다 여럿이 같이 부르는 노래이다. 말하자면 제사때 향기를 뿌리듯이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시작되는 교독문이다.

2
“여효와여 어느 때 까지이니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에서 처음부터 ‘아드 아나’가 반복리듬을 탄다. 간절히 아들을 안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아드’는 글자가 눈과 가슴의 글자 뜻으로 하여 눈으로 가슴을 보고 싶어한다.

자손이 될 아들을 보고 싶어
어느때 까지이니까
언제까지이니까

그 증거로 본문 ‘아드- 아나 여호와 트스카헨니 나자 아드- 안나 I 타스티르 에트-파네하 밈멘니’로 한다. 이 언어의 중요성을 증거 ‘아드’를 써서 홀로 쓰이지 아니하고 줄 이음표로 ‘아나’로 한다. 이 ‘아나’는 글자뜻대로라면 ‘내가 영원하다’ 뜻이다. 성경에서 ‘나’는 하나님 밖에 없다. 사전에서는 ‘어디’로라하고 번역에서는 ‘언제’라 하였으나 번역 모두 슬픔이 수반된 내용이다. 사람이 구원받을수 있을 때가 어느깨지이니까 한다. 시적 화자는 다윗은 사람이므로 방향을 잃어버린 마음 곧 갈피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 그런데 시적 의미로 보면 두 번 ‘아드’라고 하는 증거의 의미를 연결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시적 이미지로서 내가 주인이 됨으로 하여 갈바를 잃어버린 마음이 몹시 허둥거리는 모습을 표면구조로 한다.

어디게세요
어디계세요
맨얼굴을 보여주세요
안절부절 헤메요
갈팡질팡 헤메요
눈으로 가슴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3
마음에 중심을 잃어버린, 곧 내가 제일이라고 하여 내 마음을 앞세울 때 마음은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때까지 히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가 된다. 3절에서 말하는 원수 ‘오예비 알라이’ 글자는 내 원수가라고 번역되었으나 성경글자로 보면 원수란 다름아니라 내가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내가 해결하려는 마음이 원수인 적이다. 그라먄사더 하나님이 제시하는 번제물을 보이게 한다. 이 번제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표시되면서 예수님의 표시 ‘요드’가 언어 끝머리에 놓인다. 이 시적 효과는 성경모두 모든 글자에 이 ‘요드’를 놓아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주관하심을 암시한다. 글자풀이로는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내려옴을 암시한다.
성경은 ‘아드-아나’ 곧 ‘아들 아나’가 두 번 되풀이 되는데  이 때 “아드- 아나 …… 여호와 아드- 아나” 로 하여 글자그대로 ‘아들 아나 여호와의 아들 아나’가 된다. 어느때 까지이니까 언제 까지이니까라고 절규하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줄  이는 하나님이 ‘아드 아나’이다. 하나님 아들을 아나이다. ‘아드’는 증거 의미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의미가 있다. 줄로 표시된 곧 ‘빗줄기’의 시적 형상화이다. 이 ‘아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들이다. 다윗은 신의 시로 쓰면서 하나님의 아드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해 주심을 나타낸다. 다윗이 근심하고 있는 내용은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 능력의 손을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것은 물을 바라고 바라는 일인데 이 물은 바로 말씀이다. 말씀 한마디면 충분한 나날 이 날을  ‘요맘’으로 한다. 우리말에 있는 ‘요맘’ 때 쯤이라는 말이다.
이때는 근심이 가득한 ‘야곤 빌레바비’ 때이다. 근심으로 ‘여긴 바삐’이다. 그러기에 이 때를 벗어나기위하여 하나님께 ‘빌레’이다. 무엇을 위하여 빌겠다는 마음의 의사표시는 다름아닌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이다. 이 슬픔은 이 세상 여기이다. ‘야곤’이다. 슬픔은 내가 제일일 때 생긴다. ‘빌레바비’ 다른 것은 제쳐두고 가방 바쁜 일, 우리는 가장 급한 일을 빌레한다. 손을 비빕다. 가장 바삐 빌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하셔 주시길 비는 일이다. 그래서 그 증거로 처음과 나중에 두 번 ‘아드 –아나’를 놓는다. 그 해결방법은 예수님 아니면 안되는 일을 위해서 나는 바삐 빌게 된다. 곧 예배를 드리게 된다. 

4
그래서 다시 두 번 반복의 리듬을 이번에는 눈으로 영원히 볼 수 있게 되는데 또 다시  ‘아네니 여호와 … 에나’로 한다. 간절히 바라는 일을 눈으로 보게 해 달라며 앞에 여호와 글자를 넣는다. 주인공은 다름아닌 ‘아드 아나’이다. ‘아들 아나’도 되고 ‘아들 안아’도 된다. 처음은 아들을 아나 하며 주시는 일이고 두 번째 로는 아들을 안는 일이다. 문제해결은 아들에게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있어야 한다.

4
4절 역시 ‘아네니 여호와… 에나’로 한다. 이때는 생각  ‘해버렸다’의 ‘하비타’이다. 경상북도 영주 발음에 ‘하비타’는 역설법으로 하나님 당신이 해 달라는 생각을 ‘하비타’ 한다. 

5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무서웁고 두려운 것은 사망이며 바로 땅 속에 묻히는 일인데 원수 ‘오예비’는 다름아닌 내가 일의 중심을 잡으려 하는 것이 원수다. 나를 제일로 여기는 이 이기적인 마음을 억제해 달라 기도한다. ‘이길’의 기본형 ‘야콜’을 지니면서 본문 ‘예칼레티브’, 이길려 하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낫다는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시인의  마음을 열지 않고 자신이 중심을 잡으려는 것 그 자체가 내게 있어서 원수이다.
 
6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신 자의 이름을 6절에서 드러낸다. 예수 곧 구원의 뜻인 예수아를 기본형으로 ‘비수아테아’이다. 구원 안에 들어가는 일은, 그리고 언제까지이니까 해결되는 일은, 그리고 어느때까지이까가 종결되는 일은 구원 안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 방법은 예수님을 통해서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위하여라 하였다. 바로 ‘라여호와’이다. 앞의 ‘라’는 목적격으로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하여 엘로힘을 33번(창 1:1-2:3) 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이 이 세상에서 이기면서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형상인 거룩한 모습으로 사는 일이다. 다름아닌 우리 들의 아름다운 생애를 위해서 마음속에 내가 제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절대자를 섬기면서 겸손하게 살게 되면 하나님 얼굴을 매일 보는 일이 되며 이 세상을 이기게 된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으로 기쁘게 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무질서와 타락과 우울한 일생과 사회가 된다. 자신이 모든 일을 해결하는 마음이 곧 모두를 적으로 돌리어 나에게 원수가 되는 일이다. 대적을 마음에 두면 이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
다윗은 예배형식에 따른 절차로서 노래로 시를 지어 부르며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어 즐거웁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시로서 예배 인도하고 있다.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