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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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 인터뷰

가을 0 2167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길로 짐을 싸들고 떠나요. 그리고 우연히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만 봐도 하루 안에 기차를 타고야 말죠. 그렇지 않으면 없던 병이 나서 드러눕거든요.”

지난 5월8일 경인미술관에서 첫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 비평사)을 내놓은 김선우(30) 시인과 만났다. 김씨의 얼굴은 전날 여행지에서 막 돌아왔기 때문인지 봄볕에 제법 그을린 상태였다.

“강원도 평창, 원주, 춘천을 돌아보고 왔어요.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전국 각지에 아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해서 이번에도 민폐를 끼쳤어요. 지인의 차를 빌려서 혼자 여기저기 돌아보고 왔죠. 왜냐고요? 그냥 백수건달처럼 돌아다니는 일이 천성인 것 같아요.”

혼자 여행 다니는 이유를 역마살이라고 성급히 둘러대는 김씨. 선이 여리고 가냘픈 몸피와는 다르게 전국 산야에 자신의 발자국을 쿡쿡 찍고 다닌다. 봄의 햇살, 여름의 소낙비가 어디 곡식만 키워낼까. 10여 년에 걸친 여행편력이 켜켜이 쌓인 첫시집은 물에 금방 씻은 딸기처럼 싱싱함이 한껏 묻어난다. 여행지의 바람과 물과 새소리로 빚어진 70여 편의 시는 디지털 시대의 앙상한 언어들을 삼켜버릴 만큼 강렬한 생명의 독기가 담겨 있다. 더군다나 김시인의 감성으로 포착된 시어는 30대 주부들로부터 ‘나도… 나도 그래!’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초판이 발행된 지 3개월 만에 3쇄 찍기에 돌입했다.


30대 주부들이 공감하는 언어의 시인

“주로 30대 주부 독자들한테 전화가 많이 오는데요. 어느 날은 자정이 넘었을까. 깜박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낯선 여자가 막 울어요. 아이 둘을 낳은 30대 주부였는데, ‘내력’이란 시를 읽고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났다면서 잠을 못 자겠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의 어떤 경험과 제 시가 만나면서 내면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잔뜩 흔들어 놓은 모양이에요. 시를 통해 누군가와 교감한다는 사실에 정말 만만치 않은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당연히 저도 그날 잠 한숨도 못 잤죠.”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내력」 전문)

여행지에서 만나는 자연 못지않게 ‘내력’에 등장하는 김씨의 어머니 또한 시를 길러내는 영감의 원천이다. 20년 가까이 당뇨병과 그에 따른 각종 합병증으로 앓아 누운 김씨의 어머니. 게다가 재작년에 중풍으로 쓰러져 몸 한쪽을 온전히 쓰지 못하고 계신다. 7남매 중 넷째 딸인 김씨는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자신의 근원을 까마득히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다. 시간의 물살을 역류해 자신의 처음에 도달해 가는 김씨는 그래서 푸른 멍자국과 상처투성이다. 그런데도 결국 그런 상처를 다시 껴안아 주는 사람은 어머니, 그리고 가족일 수밖에 없다.

“시집 나오자마자 어머니에게 달려가 보여드렸는데 못마땅해 하세요. ‘많고 많은 제목 중에 왜 하필이면 혀가 제목에 나오느냐’며 싫어하세요. 그러면 옆에 계신 아버지는 ‘문학작품이니까 원래 그렇다’며 저를 두둔해주시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한 아버지는 김씨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지만 한때 문학보다는 교사의 길을 강요한 완강한 아버지였다.

“강릉에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대학만큼은 꼭 서울에서 다니고 싶었어요. 국문과나 영문과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는데, 아버지께서 집안형편과 동생들 생각해서 국립대학 사범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거든요.”

결국 서울행은 아버지의 만류로 포기해야 했고, 김씨는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다니게 되었다. 대학 4년 동안 학과공부는 뒷전이고 그야말로 골수 운동권이 되어 문학패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정작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김씨의 꿈이었다. 집안에 김씨를 교사로 키우려는 아버지가 계셨던 반면, 일찍부터 김씨의 문학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김씨의 마음에 시인의 씨앗을 심어준 언니가 있다.


비구니가 된 언니, 일찍 죽은 오빠, 병든 어머니

“둘째 언니가 저랑 11년 터울이 나는데요. 저한테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둘이 아주 친한데 어렸을 때 오죽헌이나 바다로 저를 데리고 다니며 ‘칼보다 펜의 힘의 강하다’는 말도 해주시고, ‘물적 풍요보다는 영적 풍요가 중요하다’는 것을 늘 강조해주셨죠. 한 마디로 언니와 특별한 영적 교감이 있어요. 힘들면 언니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며칠이고 쉬다 오는데요. 선방에 하루종일 말 한 마디 안 하고 같이 있어도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충분하게 채워지는 느낌이에요.”

김씨의 둘째 언니는 운문사 비구니. 김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출가했다. 삭발한 언니의 모습이 충격적일 수도 있는 나이인데 김씨는 ‘언니가 공부하러 가는구나. 잘 됐다’는 식으로 언니의 출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평단에는 김씨의 작품을 두고 ‘마르크스와 동양철학이 만났다’는 말도 오가는데 실제 그이의 시에는 불교철학의 색채가 진하게 배어 있다.

세상에 부대껴 사는 것보다 구도자적인 습성이 강해 불교에 귀의한 언니, 20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김씨의 시집 곳곳에 숨어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중학교 3학년 때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큰오빠가 김씨의 시를 그로테스크하게 채색한다.

“큰오빠가 지금은 부재하지만 늘 현실감을 느끼며 살아요. 부모님은 큰오빠가 죽자마자 아들을 낳으려고 다시 저부터 낳기 시작하셨죠. 영락없이 태몽이 아들이었대요. 그래서 큰오빠한테 못 벗어난 엄마는 저를 아들처럼 키웠다고 해요. 돌이 될 때까지 남자 바지저고리를 입혀 놓았으니까요. 알게 모르게 큰오빠 사건이 제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어렸을 때부터 죽음, 우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나봐요.”

어쩌다 가끔 머리가 아파서 진통제로 통증을 견뎌온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음이 아파도 시간에 의지할 도리밖에 없었던 사람이 이제 간신히 꺼내 놓는 말들, 시어들이 아기 한둘 낳아 어머니로 들어선 30대 주부들의 가슴과 속살속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김씨나 김씨의 시가 머리 싸매고 마주해야 할 정도로 늘 심각한 것만은 아니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중에서)

김씨의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시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은 시집을 풍요롭게 하는 매력적인 요소다. 토속적이면서 순백의 느낌을 자아내는 그녀만의 관능미는 여성독자들이 열광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간혹 엉뚱한 해프닝을 불러오기도 한다.

“시집 나오고 나서 젊은 남성들한테 전화가 많이 왔어요. ‘애인 있냐?’ ‘나랑 사귀어 보자’ 등등 시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저한테 접근하더군요. 요즘도 그런 전화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얼레지’란 시는 여성의 자위를 모티브로 ‘자유’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형상화한 것이고요. ‘애무의 저편’에 나오는 ‘섹스’라는 말도 몸과 몸이 만나 일어나는 관능의 경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집착이 과잉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 그리고 욕망을 통과하고 난 후에 몸과 정신이 서서히 변화되는 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시 제목이자 야생화의 이름이기도 한 ‘얼레지’는 김씨가 남해로 여행을 갔을 때 처음 대면한 꽃이다. 어느 해 2월쯤 막 녹기 시작한 눈 속에서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는 분홍색 꽃들의 생명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그래서 자신의 사진기로 찍어두고 집에 돌아와 식물도감을 뒤졌더니 얼레지가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더란다. 그래서 내친 김에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했더니 얼토당토 않게 ‘스토커’들이 극성을 부린다는 것.

김씨는 식물, 동물, 천체물리학 등 다양한 관심사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7∼8권의 식물도감을 갖고 있을 만큼 각종 식물과 야생화에 관심이 많다. 김씨가 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런 야생화를 만나고 사진 찍는 일을 즐기기 때문이다. 김씨는 야생화만 별도로 사진 스크랩을 해서 책장에 놓아두고 곧잘 창작의 소품으로 이용한다. 그렇다고 꽃과 만나는 여행이 늘 ‘팔자 좋은’ 세월만은 아니다.

“제 생활비의 절반 이상이 여행경비로 나가요. 비용을 아끼려고 여인숙에서 자거나 아니면 기차역 대합실에 있는 의자에서 자기도 해요. 한참 미친 듯이 습작할 때는 만화방에서도 잤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죠. 뭘 모르니까 용감했어요. 혼자 여행을 다니니까 한밤중에 왈칵 겁이 날 때가 있거든요. 그럼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여인숙 문고리만 노려보고 있어요. 혹시 무슨 발소리라도 들리는 것 같으면 방 문고리만 꽉 붙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아침을 맞았죠.”

그래도 무턱대고 전국 각지를 혼자 돌아다니는 김씨. 한 번은 도시에서 비비고 사는 일이 너무 척박하게 느껴져 무작정 완도에서 2시간 넘게 배를 타고 ‘관매도’에 들어갔다. 여행목적은 사람들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는 것. 한 보름 가량 민박을 하면서 민박집 할머니와 배타고 미역 따러 다니며 섬처녀처럼 살아보기도 했다.

요즘 김씨가 떠나는 여행의 목적은 영감을 얻기 위한 것도 있지만, 평생 살 곳을 물색하러 다니는 답사형태의 여행이 되고 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귀소본능이 강하다고 하잖아요. 강원도 출신들도 그에 못지 않아요. 일단 강원도에서 평생 거주할 곳을 찾아볼 계획인데요. 찾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네요. 앞으로 2년 정도 살 만한 곳을 더 찾아보고 오지이면서 소도시 성격을 갖춘 곳에서 ‘소울메이트’와 함께 정착하려고 해요. 죽을 곳을 만들어 놓고 평생 여행 다녀야지요. 그게 가장 재미있는 인생의 패턴 아닌가요?”

현재 김씨는 경기도 부천에서 혼자 살고 있다. 2∼3년 후에 두 번째 시집과 산문집을 내놓고 도시생활을 청산할 예정. 김씨가 도시를 떠나는 이유는 ‘귀소본능’도 작용했지만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문단에 먼저 데뷔한 선배 시인들 보면 첫시집은 온몸으로 통과했던 경험을 아주 솔직하게 드러내 작품성이 뛰어난 경우가 많은데요.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서 출판계의 상업적인 횡포에 심하게 무너져 내려요.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출판계도 문제지만 시인이 자기 점검을 엄정하게 안한 탓이죠. ‘시로는 사기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요. 앞으로도 처음 시작할 때의 ‘독기’를 계속 뿜으면서 철저히 문학성으로 승부할 계획입니다.”





출처 ; 여성동아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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